책소개
소설의 주인공 레니 파이퍼는 재산 축적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며, 그녀의 아들 또한 성취 지향적 사회에서 능력 발휘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함으로써 감옥에 들어가 있다. 그녀는 항상 필요한 만큼만 벌었다. 따라서 그녀는 “명예욕이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몽상가”로 불리고 “비정상적”이라고 치부된다.
뵐은 이윤만을 추구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팔꿈치로 밀어내면서 투쟁하는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회 균등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젊은이들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레니와 그의 아들 레프를 이 왜곡된 사회에 정면 도전을 하는 인물로 그린다. 이 모자는 터전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쉴 수 있는 힘을 부여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 준다. 이로써 작가는 일련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행하고 있는 ‘인간적인 것의 미학’을 실천한다.
뵐은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시장경제 논리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적이기 때문에 허위적인 연대감과 불신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면서, 레니와 레프를 내세워 필요한 만큼만 버는 새로운 인간형의 한 예를 보여 주고 있다.
200자평
하인리히 뵐에게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역행하는 주인공 레니의 삶을 주변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구성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통해서 뵐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인간적인 것의 가치를 새로이 부각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 환경 파괴를 서슴지 않는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완역으로 선보인다.
지은이
하인리히 뵐
하인리히 뵐은 1917년 쾰른에서 태어났다.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 대학교의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전후, 귀향해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미델하우베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하고 첫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를 출판했다. 1953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후부터 독일 사회와 가톨릭교회의 폐단을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9년에 발표한 《9시 반의 당구》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망각하고 재무장을 논하며 오로지 이윤 추구와 소비 조장만으로 치닫는 독일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1970년대에는 뵐의 사회 참여가 더욱 심화되며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국제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감옥에 있는 김지하를 석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1971년에는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언론계에 대한 뵐의 ‘문학적 복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이듬해 폴커 슐뢴도르프에 의해 영화화되어 크게 흥행했다. 뵐은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독일 시민들의 반핵 운동과 환경 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녹색당의 창당에도 적극 참여했다. 환경 문제를 다룬 소설이 1979년에 발표한 《배려 깊은 포위》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을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실천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쾰른 문학상’은 ‘하인리히 뵐 문학상’으로 개칭되었고 쾰른 루트비히 박물관의 광장도 그의 이름을 땄으며 독일에서 열세 개의 학교에 하인리히 뵐의 이름이 붙여졌다.
옮긴이
사지원
사지원은 독일 정부 산하 하인리히 뵐 재단의 장학생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하인리히 뵐 연구로 박사 학위(Ph. D)를 취득했다.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와 생태기반사회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하인리히뵐학회 회장과 (사)생명의숲 이사를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생태와 여성 및 문화이며 이 세 분야에 대한 100편 이상의 논문과 30여 편 이상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주요 저서로 《소외. 하인리히 뵐의 초기작품 연구》(독문), 《하인리히 뵐》, 《하인리히 뵐의 저항과 희망의 미학》, 《독일 문학과 독일 문화 읽기》, 《생태 정신의 녹색사회 : 독일》 등이 있으며 공저로 《폭력을 관통하는 열 가지 시선》, 《하인리히 뵐과 평화》, 《하인리히 뵐과 행복 사회》, 《생태사회를 위한 통합적인 접근》, 《생태사회와 세계 시민 의식》 등이 있다. 역서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 인생론》, 《열차는 정확했다》, 《9시 반의 당구》,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공역) 등이 있다.
차례
여인과 군상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정신적인 고통의 체험은 어디에 기록되는가.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의 체험은 어디에 기록되는가. 우리의 결막낭을 심장 활동의 도식처럼 도식화하는 활동은 어디에서 하는가. 밤에 우리가 남몰래 울음에 항복한다면, 그 눈물은 누가 세는가. 결국 누가 우리의 웃음과 고뇌를 걱정하는가. (…) 달의 먼지를 계산하기 위해서 또는 황폐한 암석을 지구로 가지고 오기 위해 비싼 물건을 쏘아 보낸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과학을 해야 하는가.
2.
“아니요, 아니, 난 이젠 더 살고 싶지 않아요. 이미 1929년에 더 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기력이 많지 않았어요. 이제는 기력이 전혀 없어요. 전쟁 중에는 아들 에리히가 나를 돌보았습니다. 내가 늘 바랐던 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아들이 나이가 차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나이가 찼고 그들은 아들을 데려갔어요. 열쇠공 교육을 아직 마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조용하고 과묵하고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떠나기 전에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위험했죠. ‘도망가라’라고 말했어요, ‘즉시’. 그러자 아들은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도망이요?’ 하고 내게 묻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도망치다’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했어요. 그러자 아들은 나를 웃긴다는 듯이 응시하더군요. 그 애가 어디 가서 말을 할까 겁이 났습니다. 그 애가 그렇게 하려고 했더라도 사실 어디 가서 말할 시간은 없었어요. 1944년 12월에 그 아이는 벨기에 국경으로 보내졌어요. 1945년 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애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열일곱 살이었어요.”
3.
“(…) 다시 책 한 권이 문제가 되었어요. 작가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였습니다. 책은 《유형지에서》였습니다. 그 후 나는 보리스한테 레니에게 1944년 말 유대인 작가를 추천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보리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런 건 잊었습니다.’ 결국 레니는 쪽지를 들고 도서관으로 갔어요. 여자 직원 한 사람이 아직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꽤 이성적인 나이 든 부인이었다는 것이 레니의 행운이었어요. 여인은 레니의 쪽지를 찢고는 즉시 레니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 분명하게 말했어요. (…) ‘아가씨, 모든 훌륭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군요. 도대체 누가 이런 책을 원하도록 당신을 여기로 보냈어요?’ 선생님께 또 말씀드리지만 레니는 끈질긴 데가 있습니다. 도서관의 중년 여인은 레니가 선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아채고 레니와 단둘이 있는 데서 아주 정확하게 설명했어요. 이 카프카는 유대인이고 그의 책들은 모두 금지되었고 또 분서되었다는 등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레니는 늘 그렇듯이, 놀라는 어조로 ‘그래서요?’라고 했습니다.”
4.
“예, 레니는 존재해요. 아니요, 그녀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녀는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해요.” 저자가 생각한 것처럼, 의심하는 태도는 클레멘티나의 수준보다 훨씬 밑에 있다.
게다가 클레멘티나는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어느 날 그녀는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자들 모두를 위로할 겁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치유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