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 선비의 금기된 슬픔, 102편의 절절한 눈물이 시가 되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 쓴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한다. ‘도망(悼亡)’은 ‘망자(亡者)를 애도(哀悼)한다’라는 뜻이지만, 중국 문인 반악(潘岳, 247∼300)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 ‘도망(悼亡)’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 시가 《문선(文選)》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지면서 도망시는 ‘망처가(亡妻歌)’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교적 가치관 아래 감정 표현을 절제해야 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시로 남기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 도망시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이서우(李瑞雨)의 〈도망기몽시(悼亡記夢詩)〉조차 정작 자신의 문집에는 싣지 못했으며, 현재까지 한국에서 확인된 도망시는 고작 400여 편에 불과하다.
이 책 《임재당 도망시》는 이러한 억압된 시대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다. 18세기 선비 임재당(任再堂)은 아내 풍산 홍씨를 잃고 무려 102수에 달하는 도망시를 남겼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도망시 전체 수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규모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시들이 문집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일기 《갑진일록》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일기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시점(1724년)부터 임재당 자신이 죽기 두 달 전(1726년)까지의 기록이다. 그는 “슬픈 감정을 옮기기 위해” 시를 쓴다고 고백하며, 아내를 잃은 절절한 심정을 일기 속에 쏟아 냈다.
그의 시에는 기교나 꾸밈이 없다. “당신 죽음 분명 나 때문이니”라며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한 자신을 처절하게 책망하고, “아내 없고 자식 없는 한 불쌍한 나그네”라며 홀로 남은 비참함을 토로한다. 아내의 어질었던 생전 모습을 칭송하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그 상실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증명한다.
임재당의 도망시는 문학 이전에 생존의 기록이자 자기 치유의 몸부림이었다. 아내를 잃은 지 2년이 채 못 되어 그 뒤를 따른 한 남편의 진실한 사랑과 애통함이 담긴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200자평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연가, 임재당의 ‘도망시(悼亡詩)’를 소개한다. 유교적 절제로 감정을 숨겨야 했던 시대, 임재당은 102편의 시에 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이를 잃은 슬픔과 절망을 쏟아 냈다. 조선 전체 도망시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기록이다. “당신 죽음은 내 탓”이라는 처절한 자책과 “아내도 자식도 없는” 비통함이 담긴 이 시들은, 꾸밈없는 애도의 기록이자 한 남편의 진실한 사랑의 증거다. 시를 통한 자기 치유의 본질을 보여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지은이
임재당
임재당(任再堂, 1686∼1726)은 전남 보성에 세거했던 장흥 임씨(長興任氏) 가문의 선비다.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을 지낸 대은암(大隱庵) 임대년(任大年, 1640∼1699)과 진원 박씨(珍原朴氏) 사이에서 백형(伯兄) 오우헌(五友軒) 임치당(任致堂, 1662∼1728), 중형(仲兄) 임계당(任啓堂, 1665∼1733)과 숙형(叔兄) 임자당(任子堂, 1667∼1727), 계형(季兄) 임내당(任乃堂, 1673∼1743)에 이어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임재당은 1686년 전남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출생했으며, 1706년 풍산 홍씨(豐山 洪氏) 홍처일(洪處一)의 딸(1683∼1724)과 혼인했다. 1714년 아내와 함께 고향 인근의 금장(金藏) 지역으로 이주해 살았고, 이후 아내와 어머니를 차례로 잃고 자식 없이 홀로 남았다. 과거를 준비했지만 실제로 응시하지는 않았고, 평생 벼슬하지 않은 채 선비로 살았다. 아내를 잃은 고통과 자식 없이 홀로 남은 고독은 그가 남긴 일기인 《갑진일록(甲辰日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옮긴이
임미정
임미정은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시 선집의 내용 분석, 새로운 고전 자료의 발굴과 소개, 허균의 저술 활동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한시, 한시 비평, 문헌학이다. 저서로 《국조시산 연구》(보고사, 2017), 《이담속찬 연구》(보고사, 2017), 공저로는 《다산 필사본 연구》(사암, 2019), 《한국의 레트로 인문학》(보고사, 2021), 《조선야사의 계보와 전승》(민속원, 2025), 역서로는 《이담속찬》(지만지 한국문학, 2025) 등이 있다.
차례
1. 아팠을 때 병을 알아내지 못했음을 탄식하며(嘆病不能執症)
2. 약 쓴 것이 틀렸음을 탄식하며(嘆用藥見敗)
3. 회포를 서술하며(述懷)
4. 자식 없음을 한탄하며(恨無子)
5. 그리워하며(相思)
6. 집에 사람 없음을 탄식하며(嘆屋中無人)
7. 감회를 읊으며(咏懷)
8. 또 읊으며(又)
9. 또 읊으며(又)
10.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自解)
11. 회포를 읊으며(咏懷)
12. 또 읊으며(又)
13. 또 읊으며(又)
14. 또 읊으며(又)
15. 함롱(函籠)
16. 텃밭 채소(園蔬)
17. 새 곡식(新穀)
18. 목화꽃(木綿花)
19. 안쪽 창고(内庫)
20. 그릇(器皿)
21. 남은 물건(遺物)
22. 정원의 과일나무(園中果木)
23. 새 집터(新基)
24. 또 읊으며(又)
25. 또 읊으며(又)
26. 초당(草堂)
27. 추석(秋夕)
28. 가을바람(秋風)
29. 또 읊으며(又)
30. 집(家舍)
31. 병으로 이웃집에 누워서 집을 생각하며(病臥隣家思家)
32. 집을 바라보며(望家)
33. 집에 이르러(到家)
34. 죽음을 슬퍼하며(惜亡)
35. 또 읊으며(又)
36. 마음가짐(持心)
37. 사는 곳(居處)
38. 사람 대함(待人)
39. 말하기(言語)
40. 살림살이(營産)
41. 신께 빌던 일을 생각하며(思禱神)
42. 스스로를 애통해하며(自悼)
43. 또 읊으며(又)
44. 우연히 읊으며(偶吟)
45. 또 읊으며(又)
46. 가을 풍경(秋景)
47.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48. 그리워하며(相思)
49. 또 읊으며(又)
50. 또 읊으며(又)
51. 또 읊으며(又)
52. 또 읊으며(又)
53. 감회가 일어(感懷)
54. 또 읊으며(又)
55. 감회가 일어(感懷)
56. 또 읊으며(又)
57. 하늘을 원망하며(怨天)
58. 산에 오르자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登山時感吟)
59. 집에 돌아온 뒤에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還家後感吟)
60.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61. 우연히 읊으며(偶吟)
62. 또 읊으며(又)
63. 달밤(月夜)
64.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65. 또 읊으며(又)
66. 또 읊으며(又)
67. 또 읊으며(又)
68. 추억하며(追思)
69. 또 읊으며(又)
70. 갓 열린 나무 열매를 따서 올리면서 곡하며(摘初結木果薦哭)
71.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72.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73.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74. 또 읊으며(又)
75. 또 읊으며(又)
76. 또 읊으며(又)
77. 또 읊으며(又)
78. 또 읊으며(又)
79. 살아 있음을 탄식하며(歎生)
80. 또 읊으며(又)
81. 또 읊으며(又)
82. 죽음을 슬퍼하며(哀死)
83. 또 읊으며(又)
84. 공을 생각하며(思功)
85. 또 읊으며(又)
86. 우연히 읊으며(偶吟)
87. 집안 상황을 탄식하며(歎家中形勢)
88. 처음부터 끝까지 관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追歎初終不能善治棺)
89. 송촌에서 소식이 있어(松村有便)
90. 또 읊으며(又)
91. 내동을 불쌍히 여기며(哀乃東)
92. 또 읊으며(又)
93. 옛정을 떠올리며(感舊時情話)
94. 산에 가던 날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入山日感吟)
95. 청련암에서 읊으며(在靑蓮庵吟)
96. 또 읊으며(又)
97. 또 읊으며(又)
98. 문득 지난날 내 병 고쳐 준 일을 떠올리며(忽感前日救病)
99.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感吟)
100. 제야에 내동과 함께 시골집에 앉아 감회를 읊으며(歲除夜與乃東坐村房感吟)
101. 또 읊으며(又)
102. 봄날 홀로 앉아 있으니 감회가 일어서 읊으며(春日獨坐感吟)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아팠을 때 병을 알아내지 못했음을 탄식하며(嘆病不能執症)
당신의 병을 아직 알지 못하니
평생토록 고치지 못해 한이 지극하네
날씨는 찌는 듯해 때마침 불운했고
많은 친지와도 떨어져 처지는 외롭고 위태로웠지
수명이 모두 하늘에 달렸다고 말하지 마오
어진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장수하는 것만은 아니더라
좋은 약 입에 쓰다는 말도 잘못된 것이니
당신 임종을 생각하면 애통함이 끝이 없네
君之病祟尙難知 至恨終天我未醫
日氣薰炎時不幸 諸親隔遠勢孤危
休言大命皆天定 未必仁人壽至斯
誤設藥餌從苦口 想其臨死痛無追
5. 그리워하며(相思)
오랜 시간 흘러도 기약 없으니
가득 품은 슬픈 회포 누구에게 말할까
하루 또 하루 애는 끊어지려 하니
함께 죽어 그리워하지 않음만 못하네
天荒地老曾無期 滿腹哀懷說與誰
日復日來腸欲斷 不如同死不相思
8. 또 읊으며(又)
수많은 시름과 한이 얽혀 편치 못하니
잘 때 잠시 잊었다가 깨고 나면 놀란다네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이런 마음으로 평생을 어떻게 견딜까
千愁萬恨結不平 眠時蹔忘覺來驚
自此無非相憶日 何耐將心度一生
51. 또 읊으며(又)
아프게 소리 내어 울어도 울어 봤자 소용없고
길게 노래 부르려 해도 노래도 마땅치 않아서
문득 슬픈 마음을 짧은 구절로 옮겨 보자니
시를 지은들 깊은 슬픔 다 담지 못하는구나
雖爲痛哭哭無奈 欲唱長歌歌不宜
却把哀懷輸短句 詩成猶未記深悲
56. 또 읊으며(又)
슬픔 품고 아픔 참으며 온종일 앉아 있자니
묵은 한과 새 근심이 닿는 곳마다 괴롭히네
담장 둘러 지었던 옛집도 보기 싫고
울타리 너머 들어선 새 마을 보기도 서글프네
백 년 동안 살 계획은 부질없이 흔적만 남고
반평생 깊은 정은 갑자기 끊어져 버렸네
이 이별이 인연의 끝은 아닐 것이니
언젠가 다시 마주해 이야기할 날 있으리라
含悲忍痛坐朝昏 舊恨新愁觸處煩
厭見墻垣成古宅 愁看籬落占新村
百年生計空留迹 半世深情忽斷恩
此別應知緣未盡 何時相面更相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