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4대 장편을 국내 최초로 1인이 번역하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은 각 작품의 분량이 대하소설에 육박할 정도로 장대하다. 이 대작들의 번역 역시 치열한 작업이다. 한 사람이 4대 장편을 다 번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고, 한국에서는 김정아가 유일무이하다. 4대 장편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서로 잇닿아 있다. 고유한 문체 역시 각기 다른 사람의 작업으로는 일관된 결을 살리기 어렵다. 한 사람이 번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아 단독으로 4대 장편을 번역했다는 건 우리 출판계의 쾌거이고 독자들을 위한 선물이다. 이 번역 작업은 백 년 갈 번역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국내에 소개하겠다는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열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김정아는 가장 성실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유려하고 가장 현대적으로 4대 장편을 번역했다.
막장 너머의 진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탐구
표면적인 줄거리로만 본다면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친아들에 의한 아버지 살해를 둘러싼 주요 인물들이 엮어 내는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아버지인 표도르는 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으로, 육욕과 정욕,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만이 남은 저열한 본능의 화신이다. 그는 아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스물두 살의 글래머 미인인 그루셴카를 놓고 장남과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
장남 드미트리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라는 아름답고 오만한 귀족 여인과 약혼을 한 사이이나, 늙은 상인 삼소노프의 첩으로 있던 그루셴카에게 완전히 넋이 나가,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카테리나를 자신의 동생 이반에게 양보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를 비롯해 작품의 주요 인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있으며, 연관된 이들이 모두 부자 또는 형제간이다.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플롯 라인을 갖는 소설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명작이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해답은 플롯 자체가 아니라 인물들 자신과 그 인물들의 성격과 사상이 서로 부딪치고 공명하는 긴밀한 구성에 있다. 작가는 가치관의 변화가 심하고 무신론 등 서구 사상이 횡행하던 19세기의 러시아 현실을 배경으로 가족의 분열을 그리면서, 하나하나의 인물과 그들의 심리 변화, 사상 변화 속에 모순적이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담아내고 있다. 또 시대적 문제들을 지성의 대변인인 이반을 통해 제시하며, 그의 분열과 파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체르니솁스키적인 이해는 옳지 않으며, 그런 유의 답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항해, 알료샤를 통해 근본적이고 영원히 옳은 해답, 즉 작가의 사상이 집약된 종교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드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육체적인 정욕을 물려받았으나, ‘치마만 두르면 어디나 달라붙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표도르의 퇴폐적인 정욕과는 달리, 그루셴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성적이고 정열적이며 진지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 표도르와는 서로 그루셴카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5년간이나 잊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첫사랑에게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자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소중히 하며, 그것을 자신의 행복보다 앞에 두는 것이리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작가에게 매우 긍정적인 자질 중의 하나이자, 불멸과 신의 세계를 향한 길, 즉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다. 드미트리의 사랑의 대상이 이지적이고 차갑고 오만한 카테리나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정 많은 전형적 러시아 미인인 그루셴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루셴카는 드미트리를 보고 “짐승 같은 데가 있으나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억세고 뛰어난 육체적 완력과, 충동과 감정에 충실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아버지 표도르에게서 물려받은 호색하고 방종한 생활에 기우는 면을 지녔다. 카라마조프의 저열한 본성을 나타내는 “거미”를 영혼 속에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타인의 명예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반 : 이성과 논리의 화신인 무신론자
이반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우 재능이 뛰어나고, 동생 알료샤와는 달리 자신이 남의 밥을 얻어먹고 살고 있음을 날카롭게 자각하며, 과학과 수학의 신봉자이나 일반 범죄에 대한 교회의 재판권에 대한 논문을 써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주로 이반의 이야기를 다룬 〈제5장 프로(Pro)와 콘트라(Contra)〉는 작가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얘기하는 부분이며,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4. 반역’과 ‘5. 대심문관’의 서사시는 소설의 플롯 라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약해서, 따로 떼어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실제로 ‘대심문관’만 따로 출판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미약한 외적 관계 대신에 주제에서, 또 작가의 주된 의도에서 그 내적인 관계는 ‘반역’과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작품 전체의 중심이자, 다른 모든 테마의 주된 연결고리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반역’에서 이반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고통과 눈물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죄 없는 고통을 야기한 자들이 저 마지막 시간에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흘린 죄 없는 눈물에 대한 보상은 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만약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조화도 평화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이반은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지성적 논리적 종교적 문제들을 논한다.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결이다. 그는 예수가 사막에서 있었던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인류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고 비난한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자유 의지를 감당할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의 신이라면, 대심문관 자신은 나약한 영혼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선악 선택의 자유 의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을 대신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선택해 보여 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대신 져 주겠다고 한다.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이 모든 대립과 비난은 도스토옙스키를 일생 동안 괴롭혀 온 대립이자, 작가 스스로도 이성적으로는 부정하기 힘든 논리였다. 대심문관은 이반이요, 지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자아다. ‘대심문관’을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지성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며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일생 동안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고민해 왔던 문제, 즉 신의 문제”가 대심문관에서 극화된다.
알료샤 : 한 알의 밀알
이반이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무신론자의 가짜 사랑, 공상적 사랑의 대변자라면, 알료샤는 살아 숨 쉬는 이웃에 대한 능동적이고 진정한 실천적 사랑의 체현이다. 이반의 사랑이 머리와 말로 된 것이라면, 알료샤의 사랑은 가슴과 행동으로 하는 사랑이다. 이반의 사랑이 “개미 떼”와 같은 인류에 대해 적선해 주는 듯한 오만한 가짜 연민이라면, 알료샤의 인간관은 한배를 탄 인류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다. 이반은 모두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지만, 알료샤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것, 모든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꼭꼭 숨겨 놓았던 상처받은 자아도 드러내 놓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긍정적 인물들은 말하는 자가 아니고 듣는 자들이다. 알료샤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경우가 많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밝고, 적극적이며, 무엇보다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굳은 심지 같은 것을 지닌다. 그는 모든 인물들의 구심점이자, 타인들을 움직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중심인물이다. 모든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지성인 이반조차도 알료샤가 있어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이반의 말처럼, 알료샤는 긍정과 삶의 전도사다. 그루셴카도 알료샤를 타락시키기 위해 그를 초대하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정신적인 갱생의 길을 걷게 된다. “누이”라는 알료샤의 말 한마디는, 그녀에게서 표독스럽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라는 마스크를 벗기고, 관대하고 부드럽고, 사랑할 줄 알고, 연민할 줄 알며, 희생적인 자아를 살아나게 한다. 음탕하고 이기적인 노인인 그의 아버지 표도르조차도 ‘머리보다 가슴이 좋은 사람이라는’ 알료샤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감동하며,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알료샤는 남녀노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성적인 오만한 사람, 감정적이고 직정적인 사람,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개개인 안에 있는 아름다운 자아를 이끌어 내도록 도와준다. 그는 만나는 모든 인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인물 하나하나가 그에겐 똑같이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반이 회의하고 묻고 질문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성적인 자아라면, 알료샤는 회의하는 자아에 종지부를 찍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답하는 신앙심 깊은 도스토옙스키의 종교적인 자아다.
200자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다. 원래 이 작품은 2부로 구상되었으나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으로 2부는 집필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미완의 대작은 그 자체만으로도 테마나 플롯에서 하나의 완성된 장편 소설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4대 장편은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순으로 출간되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었던 크고 작은 사상적 문제들의 총합이며 그 문제들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가장 성숙한 답변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두터운 분량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심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너무도 방대한 이 소설을 1879년과 1880년, 2년 만에 썼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을 탈고한 지 두 달 만에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또 자신이 평생을 두고 옹호했던 신의 품에 안겼다.
지은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구력)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고,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생활을 보낸다. 그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옮긴이
김정아
김정아는 1969년 1월 1일 새해 벽두에 출생했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안동이고 2녀 1남 중 차녀이다. 성장은 서울에서 했다. 한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노어노문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학부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ᐨChampaign) 대학원 슬라브어문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동 대학원에서 슬라브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폴란드 문학을 부전공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처음 만났다. 문학소녀라면 옆에 끼고 다니던 두툼한 서양의 고전소설들 중 그녀는 유독 그 어려운 《죄와 벌》에 꽂혔고,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녀의 영혼이 1800년대의 도스토옙스키와 교감을 시작한 것이었고, 그 순간부터 그녀가 일명 “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는 도스토옙스키와 진한 사랑을 시작한 것이었다.
풋풋한 18세 소녀였던 그녀는 38년의 세월을 통과해 흰머리가 서너 가닥 보이는 중년이 되었다. 일반적 세상 법칙과는 달리 어찌 된 일인지 “도 선생님”과 사랑의 화학작용이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강해져 이제는 도스토옙스키가 그녀 안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되었다. 대학 시절, 대학원 시절, 유학 시절,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 그리고 그 후 사업가 김정아라는 제2의 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어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도스토옙스키를 단 한순간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그녀는 2008년에 운명처럼 고전 전문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을 만났다. 이후 3∼4년에 걸쳐 4대 장편 발췌본과 도스토옙스키의 주요 작품 8종을 출간했다. 그녀의 책은 작품보다 해설의 분량이 더 많았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정통한지, 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마침 출판사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하려던 참이었고, 그녀의 열정과 전문성을 눈여겨보았다. 출판사 박영률 대표는 그녀에게 “도스토옙스키와 영혼의 스파크가 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예리한 통찰의 한마디에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4대 장편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국내에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출판사 대표와 한 약속, 백 년 갈 번역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죄와 벌》을 시작으로(2020) 《백치》(2021) 《악령》(2023)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025)을 차례로 출간했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한 사람이 번역한 예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고, 한국에서는 유일무이하다. 이 프로젝트는 고급가죽장정 한정판을 함께 출간하는 것이었는데 출간 후 수주, 수개월 만에 매진되었고, “흠집 난 것이라도 사고 싶다” “다음 책은 언제 나오나?” 등 관심이 이어졌다. 한국의 출판계로서는 이례적이었고 고급출판물의 물꼬를 열어 준 것으로 평가되었다.
김정아는 한마디로 도스토옙스키에 영혼을 저당 잡힌 사람, 솔메이트,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미친 사람이다.
4대 장편을 번역하면서는 얼마나 깊은 교감을 했던지 감격, 고통, 연민, 원망, 환희, 절망, 이런 온갖 감정의 파도가 몰아지는 바람에 번역 도중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고, 번역이 끝난 후에는 마치 배우가 자신이 몰입한 배역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심오한 도스토옙스키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출판사 편집자에게 “나 이러다 미칠지도 몰라요”라는 절규를 하기도 했다.
김정아는 한국에서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가장 성실하게 가장 정확하게 가장 유려하게 번역한 유일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한 사람이 4대 장편을 모두 번역한다는 것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마다 잇닿아 있는 작가의 사상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독특한 문체의 일관된 결을 유지할 수 있다는 데서 큰 의의가 있다. 한국 출판계의 성과이고 한국 도스토옙스키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김정아는 “대작 번역이라는 심신이 고된 작업을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고, 엉덩이의 감각이 없어지고, 허리, 어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나의 영원한 사랑 도스토옙스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쁘다. 문장의 내용뿐 아니라 하나의 단어가 갖는 의미까지 생각하다 보니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면 볼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났다. 도스토옙스키가 있어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며, 그가 남기고 간 글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며 내 삶을 보낼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노라고 삶의 끝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정아의 번역을 출판사는 힙(Hip)하다고 평가한다. ‘힙하다’는 말은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트렌디하고 신선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이 번역이 지극히 현대적이어서 요즘 언어로 설명하는 듯 쉽고, 거기에 역자가 가진 경쾌함이 더해져 유연하고 따뜻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성이 독자로 하여금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
차례
주요 등장인물
작가로부터
제1부
제1장. 어느 작은 가족의 내력
1.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2. 장남을 내쫓다
3. 두 번째 결혼과 두 번째 아이들
4. 셋째 아들 알료샤
5. 장로들
제2장. 부적절한 모임
1. 수도원에 도착하다
2. 늙은 어릿광대
3. 신심 깊은 시골 아낙들
4. 신심 약한 귀부인
5. 아멘, 아멘!
6. 저런 인간은 대체 왜 살까!
7. 신학도−출세주의자
8. 스캔들
제3장. 음탕한 사람들
1. 하인의 방에서
2. 리자베타 스메르댜샤야
3. 열렬한 마음의 고백. 시 형식으로
4. 열렬한 마음의 고백. 일화 형식으로
5. 열렬한 마음의 고백. “곤두박질”
6. 스메르댜코프
7. 철학적 논쟁
8. 코냑을 마시며
9. 음탕한 사람들
10. 두 여인이 한자리에
11. 또 하나의 실추된 명예
제2부
제4장. 감정의 격발
1. 페라폰트 신부
2. 아버지 집에서
3. 초등학생들과 어울리게 되다
4. 호흘라코바의 집에서
5. 거실에서 감정의 격발
6. 오두막집에서 감정의 격발
7.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제5장. 프로(Pro)와 콘트라(Contra)
1. 언약
2. 기타를 든 스메르댜코프
3. 형제들, 서로를 알아 가다
4. 반역
5. 대심문관
6. 아직은 몹시 막연한 우수
7. ‘영리한 사람과는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도 흥미롭다’
제6장. 러시아의 수도사
1. 조시마 장로와 그의 손님들
2. 고 스히마 수도사제 조시마 장로의 《생애전》에서, 장로 자신의 말을 토대로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엮음
3. 조시마 장로의 담화와 설교에서
제3부
제7장. 알료샤
1. 시체 썩는 냄새
2. 이런 순간
3. 양파 한 뿌리
4. 갈릴리 가나
제8장. 미탸
1. 쿠지마 삼소노프
2. 랴가비 …
3. 금광
4. 어둠 속에서
5. 갑작스러운 결정
6. 내가 간다!
7. 옛사람,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사람
8. 섬망
제9장. 예심
1. 관리 페르호틴 출세의 시작
2. 소동
3. 고난 속을 걷는 영혼. 첫 번째 고난
4. 두 번째 고난
5. 세 번째 고난
6. 검사가 미탸를 포획하다
7. 미탸의 위대한 비밀, 야유를 받다
8. 증인들의 증언. 언나
9. 미탸, 호송되다
제4부
제10장. 소년들
1. 콜랴 크라솟킨
2. 꼬맹이들
3. 한 초등학생
4. 주치카
5. 일류샤의 침대 곁에서
6. 조숙
7. 일류샤
제11장. 이반 표도로비치 형제
1. 그루셴카의 집에서
2. 아픈 발
3. 어린 악마
4. 찬송과 비밀
5. 형이 아니야, 형이 아니라고!
6. 스메르댜코프와의 첫 번째 만남
7. 스메르댜코프를 두 번째로 찾아가다
8.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스메르댜코프를 찾아가다
9.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
10. “이건 그놈이 한 말이다”
제12장. 잘못된 판결
1. 운명의 날
2. 위험한 증인들
3. 의학 감정과 호두 한 푼트
4. 행운이 미탸에게 미소 짓다
5. 급작스러운 파국
6.검사의 논고, 성격 묘사
7. 사건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개관
8. 스메르댜코프에 대한 논고
9.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심리 분석. 질주하는 트로이카. 검사 논고의 피날레
10. 변호인의 변론. 양날의 칼
11. 돈은 없었다. 강도짓도 없었다
12. 게다가 살인도 없었다
13. 사상의 간음자
14. 촌놈들이 제 고집을 부리다
에필로그
작품 이해를 돕는 자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자기가 어리석고도 바보 같은 질문들을 하고 있음을, 그러나 반드시 그런 식으로 묻고 싶었고, 꼭 그런 식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감동이 심장 속에 마구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울고만 싶다. 언나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시커멓게 마른 아이들의 어머니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이 순간부터 어느 누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모든 사람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다.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바로 지금 당장 카라마조프식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2.
“이 끔찍한 두 달 동안 형은 혼자 있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알료샤는 이전과 같이 조용히, 그리고 또박또박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기 의사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어떤 저항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듯, 정신 나간 것처럼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형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살인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형 자신이라고 스스로에게 고백해 왔어. 하지만 형이 죽인 게 아니야, 형이 틀린 거야, 살인자는 형이 아니야, 내 말을 들어, 형이 아니야! 이 말을 하라고 하느님이 나를 형에게 보내신 거야.”
3.
만약 우리 가슴속에 단 하나의 좋은 추억이 남아 있다 치더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후에 나쁜 사람이 될지도 모르고, 또 바보 같은 행동 앞에서 버텨 내지 못할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아까 ‘모든 사람을 위해 고통받고 싶다’라고 외친 콜랴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악한 조소를 퍼붓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쨌건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일류샤를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우리가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이야기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도, 설사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얼마나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던가에 대해서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