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낭만주의 시인 하이네, 춤과 시로 파우스트 전설을 되살리다
파우스트 이야기는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 중 하나로, 이 전설을 토대로 무수한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하이네의 《파우스트 박사. 무용 시》(1851)는 파우스트의 지식과 권력에 대한 열망, 악마와의 계약, 세속적 쾌락 추구, 죽음 등 핵심 요소를 담되, 고유의 해석과 성찰을 추가했다. 특히 시와 춤이 결합한 것이 특징인데, 유혹, 지식, 도덕적 타락과 같은 작품의 주제를 탐구하는 은유적 수단으로 춤이 활용되었다.
이 작품은 원래 런던의 ‘여왕 폐하 극장’의 총감독 벤자민 럼리의 요청에 의해 쓰인 것이다. 발레 〈지젤〉이 하이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걸 안 럼리가 하이네에게 파우스트를 소재로 발레 대본을 써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결국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유명 출판인이었던 율리우스 캄페에 의해 《악마와 마녀, 그리고 시 문학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인 무용 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출간 직후 비평가들의 반응은 엇갈렸으나 파우스트 전설에 관한 하이네의 혁신적인 접근, 즉 춤을 서사적이고 상징적인 장치로 도입하여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제시한 점에는 찬사가 쏟아졌다.
춤은 파우스트 전설의 서정적이고 비판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전설의 주제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하게 한다. 다시 말해 춤이 파우스트의 내면적 갈등과 이중성을 창의적으로 탐구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전설 속 추상적인 철학 개념과 시각적 움직임을 결합하여 다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감상자가 작품의 의미 생성 과정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파우스트 박사. 무용 시》에서 춤은 에로티시즘과 결합하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 속 두 무용수가 추는 ‘파 드 되’는 작품에서 성적인 매력이나 관능적인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원래 고전 발레에서 파 드 되는 연인 관계를 표현하는 춤의 용어로 그 자체로 성적인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하이네는 고전 발레의 엄격한 성 역할이나 형식에서 벗어나, 파 드 되를 통해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을 구현한다. 무용수의 에로틱한 표현은 에로스적 충동을 자극하며 감상자를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며, 무용수와 감상자 사이의 정신적 교감을 완성한다.
파우스트 전설을 남긴 것은 괴테만이 아니다
파우스트 전설을 모티브로 한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일 것이다. 하이네는 독일 고전주의의 거장인 괴테의 문학적 역량은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파우스트를 다룬 방식에 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괴테는 걸작을 만들었지만, 파우스트 전설과 민담의 본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이네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여성인 메피스토펠라로 등장시키고 또한 파우스트를 괴테의 파우스트보다 더 성적 욕망에 휘둘리는 인물로 변모시킴으로써 원형, 즉 전설과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 파우스트에 더 가깝도록 썼다고 주장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하이네의 비판과 주장이 파우스트 이야기의 단순한 줄거리나 역사적 맥락을 넘어, 작품의 서사 구조, 문체, 기법 등과 같은 문학 자체의 고유한 특성 탐구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네의 파우스트 전설 분석, 시대 배경, 미학적 특성에 관한 심층적인 탐구는 소재로서의 파우스트 이야기에 대한 비평적, 이론적 접근일 뿐만 아니라 문학사적 측면에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심리나 무의식적 욕망을 전설과 민담에서 찾아내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 체계와 연결 지음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고 특정 지역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네의 《파우스트 박사. 무용 시》는 괴테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독자적인 해석과 예술적 실험성, 그리고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보편적인 특성들을 탐구한 것은 현대의 독자에게도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주어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200자평
독일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발레 공연을 위해 쓴 시극이다. 하이네의 후기작 중 백미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유명한 파우스트 전설을 춤과 시로 재해석했다. 하이네 특유의 접근 방식으로 전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면서 그 안에 숨은 아이러니를 과감히 드러낸다.
지은이
하인리히 하이네
괴테, 실러와 더불어 독일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낭만주의풍의 시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여러 작곡가가 그의 시를 노랫말로 삼아 아름다운 성악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서정시인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하이네는 ‘3월 이전’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서 신문과 잡지 기사를 비롯하여 소설, 드라마, 수필, 여행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당대의 현실을 질타했던 참여 지식인이자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회 비판, 즉 독일의 정치와 정신세계에서 나타나는 반동적 요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에 직면하게끔 했고, 프랑스 7월 혁명(1830)에 열광했던 그는 결국 1831년 독일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곧 파리의 살롱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조르주 상드, 외젠 들라크루아,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리스트 등 당시 파리 문화계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하이네는 늘 독일을 그리워했고 그리움은 매번 고통으로 남았다. 그의 작품은 독일에서 검열과 압수의 대상이었고, 프로이센 정부는 하이네를 추방할 것을 프랑스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향수병에 더해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이네는 1856년 2월 17일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행 화첩》, 《노래의 책》, 《로만체로》, 《파우스트 박사. 무용 시》, 《고백록》, 《망명 중의 신들》, 《루트비히 마르쿠스》, 《1853년과 1854년의 시》, 《루테치아》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옮긴이
김희근
김희근은 독일 뮌스터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하이네의 메시아적 전망》, 《성과 속, 그 사이에서의 문학 연구》, 역서로 요제프 로트의 《거미줄》, 하인리히 하이네의 《슈나벨레봅스키 씨의 회상 / 바헤라흐의 랍비》, 《하르츠 여행기》가 있으며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들어가며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왕비 폐하 극장 총감독 럼리 에스콰이어께 드리는 편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자정을 가리키는 종소리. 책 더미와 실험 도구로 뒤덮인 테이블 옆 높은 안락의자에 파우스트 박사가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16세기의 독일 학자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쇠사슬이 달린 2절판의 대형 서적이 있는 책장으로 향한다. 그는 자물쇠를 열어 꺼낸 책(말하자면 악령을 부르는 주문서)을 테이블로 가져온다. 그의 몸짓에서 서투름과 용기, 어색한 권위와 고집이 센 박사의 자부심이 뒤섞여 나타난다. 불을 붙여 등을 밝히고 칼로 바닥에 다양한 형상의 마법진을 그린 뒤 그는 그 큰 책을 연다. 악마를 부르는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린다. 방이 어두워진다. 번개와 천둥이 친다.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틈에서 불붙은 붉은 호랑이가 솟아오른다. 파우스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조롱을 퍼부으며 불붙은 짐승에게 다가간다. 즉시 꺼져 버리라고 명령하는 것 같다. (…) 파우스트는 더욱 열정적으로 주문을 외운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둠이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등불로 방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천둥 대신 감미로운 춤곡이 들린다. 그리고 꽃바구니에서 나온 것처럼 갈라진 땅에서 평범한 망사와 몸에 착 붙는 트리코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발레리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주위를 이리저리 가볍게 나풀거리며 진부한 피루엣 동작을 취한다.
-〈제1막〉 중에서
2.
마녀들의 안식일 축제가 열리는 밤 풍경. 넓은 산 정상. 양편으로 나무들이 있고, 가지에 걸린 등불이 무대를 밝히고 있다. 무대 중앙에는 돌로 만든 받침대가 제단처럼 놓여 있고, 그 위에 검은 인간 얼굴을 한 염소가 서 있다. 두 뿔 사이로 불타는 촛불이 보인다. 겹겹이 쌓이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원형극장처럼 무대를 둘러싸고, 거대한 계단 위에 지하 세계에서 온 고귀한 신분의 관객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앞의 막에서 보았던 지옥의 왕들이다. 그들의 몸집이 이전보다 더 커진 것 같다. 새의 얼굴을 하고 이상하게 생긴 현악기와 관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나무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무대는 이미 다양한 나라와 시대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에 의해 활기가 넘친다. 무대 전체가 가면무도회를 연상케 한다. 상당수가 변장하고 가면을 쓰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들이 괴상하고 기이하며 모험심에 사로잡힌 존재라 하더라도, 미적 감각을 잃은 존재로 그들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 일그러진 얼굴로 인해 추하다는 인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손에 횃불을 든 남자와 여자 한 쌍이 제단 앞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존경과 복종을 맹세하는 입맞춤의 의식을 치른다.
-〈제2막〉 중에서
3.
괴테는 제2부에서 마법사를 악마의 발톱에서 구했습니다. 그를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춤추는 천사들, 그리고 가톨릭교에 자주 등장하는 날개 달린 큐피드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천국에 들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들에게 소름 돋는 두려움을 안겨 준 악마와 맺은 끔찍한 동맹이 경박한 희극으로 끝나 버렸죠. (…)
제 발레 대본은 파우스트 박사에 관한 옛 전설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요 요소들을 극적인 전체로 연결하면서 저는 세세한 것까지 충실하게 기존 전통을 따랐습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민중들을 위한 책에서 처음으로 발견하고 어린 시절 인형극에서도 보았던 그런 것들입니다.
-〈왕비 폐하 극장 총감독 럼리 에스콰이어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