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헤겔, 마르크스, 니체는 현대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르페브르는 이 책에서 헤겔, 마르크스, 니체가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현대성의 작동에 각각 어떻게 개입되어 있으며,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추궁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성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현대 세계가 헤겔적이고, 마르크스적이며, 니체적이라는 서두의 언급은 이 교착 상태의 다른 표현이다. 세 철학자의 사상과 그들의 동시적인 얽힘은 현대 세계에 방대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의 사상은 세계가 된 사상(pensée devenue monde)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관심은 단순히 이 교착 상태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극복(dépassement)’하는 데로 향한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이들 사상에는 현대 시대의 예견뿐만 아니라 시대를 극복하는 고유한 방향성이 내재해 있다. 결과적으로 각각의 극복은 결코 세 철학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 전에 없는 새로운 그림자와 진창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귀결되나, 르페브르는 이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현대성을 둘러싼 세 철학자들의 통찰과 좌절을 서로 잇고 직시하는 것, 이것이 르페브르가 취조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헤겔 파일
헤겔에게 현대성은 ‘국가 체계’의 완성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정치적 계급’을 기축 삼아, 지식과 권력의 체계적 합일을 이루고, 그 속에서 초월적 실체가 된다. 오늘날은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강력한 국가가 지배하는 시기다. 국가와 제도 정치가 ‘물신’화한 결과 대부분의 정치인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헤겔주의자가 되어 이 흐름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게 된다. 르페브르가 볼 때 헤겔은 현대를 지배하는 괴물 국가의 정체와 그 절대적인 파급력을 적중시켰다.
마르크스 파일
마르크스는 국가로 수렴되는 ‘절대적·체계적’ 사유에 맞서 ‘비판적’ 사유를 내세운 철학자다. 이 관점에서 현대성은 결코 국가로 폐쇄될 수 없는 변화와 운동의 프로젝트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이 시기 세계의 풍경을 바꾸었고, ‘사회’를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이때 마르크스는 산업과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구축되는 ‘사회적 힘’에 주목했다. 즉 마르크스는 이 사회적 힘에 사회 위로 들어 올려진 기성 국가를 끝장내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르페브르가 보기에, 마르크스 사유의 근본 지향과 그가 제시한 혁명적 가능성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 ‘국가 소멸’에 있다. 그러나 국가 소멸을 비롯해 마르크스의 전망 가운데 온전히 현실화된 것은 하나도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자칭 마르크스 계승자들과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 소멸이라는 마르크스 사유의 지향을 근본적으로 틀어 버렸다는 데 있다.
니체 파일
니체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의 절대적·체계적 사유와 괴물 국가에 맞선 철학자로 제시된다. 니체의 지향은 ‘즐거운 학문’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니체의 시선은 ‘문명’적 차원을 향해 있으며 그는 서구 문명이 몸과 체험을 억압한 대가를 치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최후에는 오직 자동적인 재생산만 남겨지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문명은 그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니체는 이 사태를 진정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신의 죽음에 이어 인간의 죽음, 나아가 모든 종언들 그 자체를 종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려 한다. 그것이 완전한 가치 전환을 통한 새로운 문명 탄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파괴와 탄생을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초인을 통해서 창조적 탄생을 이끄는 힘의 진원은 어디인가? 바로 ‘지금, 여기’의 일상이다.
마주침과 얽힘이 만들어 내 그림자, 가능성을 제시하다
헤겔, 마르크스, 니체, 세 철학자는 서로를 비추는 성좌를 이룬다. 그것은 또한 현대 세계에 드리우는 새롭고 거대한 그림자의 진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셋 가운데 반드시 하나의 정답을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르페브르는 자본주의적 현대를 둘러싼 비관과 공허를 돌파하는 이중적 전략이 필생의 과제였다고 말한다.
르페브르는 현대성의 교착 상태를 형성하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의 삼중적인 결절점들의 마주침과 예측불가한 얽힘을, 교착 상태를 타파할 새로운 비전의 가능조건으로 삼는다. 이 가능조건은 전통적인 철학의 선험적이고 불가침적인 형식과 거리가 멀다. 르페브르는 가능성이 본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에게 가능성은 계기들이 중첩되고 농축되면서 변화의 임계점에 육박해 들어가는 운동 이미지로 표현된다. 예정된 조화가 없는 세계로 최초의 한 발을 밀어 넣을 때, 그것이 가능한 변화의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의 ‘그림자의 왕국’은 단순히 불확실성의 어두움에 쌓인 교착 상태가 아닌 돌파의 잠재적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현대성의 위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분리하지 않고,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것, 곧 둘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인식은 전통적인 철학의 인식론을 넘어선다. 르페브르는 이 새로운 인식 방식을 ‘메타철학적(métaphilosophique)’인 것으로 명명하는데, 메타철학적 사유는 곧 가능성과 실재를 연결하는 사유다.
메타철학적 사유의 특장점은 무엇보다도 현대 시대의 난해하고 복잡한 풍요로움에 대한 통찰에 있다. 르페브르가 세 철학자를 경유해 현대성의 돌파를 모색하던 반세기 전은 물론 오늘날에도 최악의 징조들은 건재하다. 오히려 새롭고도 낯익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전쟁과 폭력이 점증하며,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혐오조차 합법화하는 수준으로 추락 중이다. 문자 그대로 지구와 생명체의 절멸 또한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존속이 걸린 문명적 차원의 위기다.
‘가능성’의 철학자 르페브르의 이 책은 불가능성으로 점철되고 경화된 사회를 건너려는 그의 사유의 흔적을 담고 있다. 혹자에게는 그 흔적이 이미 개척된 바 있는 경로를 환기하는, 이른바 ‘주체 철학’의 흘러간 이야기 정도로 치부될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길을 나설 참인 누군가 있다면, 이전에 열렸던 문일지라도 반드시 스스로 다시 열어야 한다. 르페브르가 나아간 길과 그가 남긴 사유의 포즈는 새로운 비전을 개척하는 도정에 선 이들에게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200자평
프랑스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가 ‘현대성’이라는 주제 아래 19세기 독일의 세 철학자, 헤겔, 마르크스, 니체를 불러들여 대질심문한다. 세 철학자의 오랜 독자이자, 이들을 핵심 줄기 삼아 사유를 펼쳐 온 르페브르의 사상적 지표와 원천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르페브르가 도시와 공간 문제로 이행하게 된 철학적 배경을 드러낸다.
지은이
앙리 르페브르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다. 7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은 농촌사회학, 일상생활, 도시, 공간, 국가 등 방대한 주제 영역을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일상생활 비판》 연작(1947, 1961, 1981, 총 3권)과 도시 공간에 대한 저작들, 《공간의 생산》(1974), 《도시혁명》(1970), 《도시에 대한 권리》(1968) 등이지만, 르페브르는 자신의 사상의 줄기가 된 19세기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 또한 꾸준히 진행했다. 그는 학문적 이력의 초창기에 《마르크스 선집》(1934)과 《헤겔 선집》(1938)의 출간에 참여했고, 파시즘으로 공격받던 니체 사상을 구제하고, 그의 급진적 철학을 재조명하는 《니체》(1939)를 펴내기도 했다. 본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혹은 그림자의 왕국》(1975)은 이들 세 사상가를 현대성의 문제틀 속에서 대질하고 종합하는 작업으로, 르페브르 사상의 궤적을 압축하고 그가 도시와 공간 문제로 이행하게 된 철학적 배경을 드러낸다.
옮긴이
신승원
신승원은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르페브르의 공간건축술〉, 〈칸트 공간론의 전개〉, 〈도시사회의 우정론〉, 〈르페브르 도시론의 전개 : 도시적 해방에서 차이 공간의 생산으로〉 등의 논문과 《앙리 르페브르》, 《공간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이해》(공저) 등의 단행본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탈산업사회에서 포스트모던사회로》(크리샨 쿠마르 저, 공역), 《포스트메트로폴리스 2》(에드워즈 소자 저, 공역), 《도시혁명》(르페브르 저)이 있다.
차례
1장 삼중성
2장 헤겔 파일
3장 마르크스 파일
4장 니체 파일
결론과 후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헤겔이 제시한 내용의 경악할 만한 현실성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현대 국가는 전문 정치가, 기술 관료(때때로 둘은 일치한다)가 형성한 ‘정치적 계급’에 의해 운영된다. 이러한 현대 국가는 자신의 고유한 구조를 −국가 자신의 통제에 따르는 생산과 동시적으로− 재생산하는 자동주의를 그 목표, 목적, 의미 지평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자동주의 속에서 ‘시민(citoyen)’으로 승격되고 시민권(citoyenneté)으로 정의되는 ‘인간’은 국가가 제공하는 만족(물리적, 문화적, 정치적−이 놀라운 삼중성!)을 군말 없이,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끔찍하게 완벽하다. 약간의(아주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인간’ 자체는 사라지고, 그는 보나파르트적인 방식에 따라 시민ᐨ병사,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치적 병사로 변화한다. 즉 멋진 군사 기계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설령 헤겔에 무지하거나 그를 간접적으로 알지라도, 무수히 많은 지도자, 저명인, 정치가, 기술 관료들은 이런 그림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
2.
‘마르크스는 죽었다.’ 이 음울한 사실은 이데올로기적ᐨ정치적인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거대한 현대적 묘지에서 신, 인간, 예술, 역사의 죽음 등 다른 무덤들 사이에서 십자가를 꽂고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죽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국가는 예외다. 국가의 죽음은 마르크스가 명시적으로 선언한 유일한 죽음이다.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주의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은 이미 골백번 선포되었고, 우파건, 혹은 어떤 특정 좌파건 좋은 언론이 퍼뜨린 이 좋은 소식은 이른바 ‘정통파’를 불길 사이에 가두고 그 정치적 기반을 위태롭게 했다….
3.
니체는 종교를 다루든, 국가·경제·정치에 대해 다루든, 그 모든 곳에서 언제나 표상, 이데올로기, 지식에 의한 정당화를 단칼에 거부했다. 다소 지나치게 현대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니체는 현재 사용되는 코드(codes)를 간파하고 공식화한 다음 그것을 쓰레기로 취급해 버린다. 즉 니체는 체험된 것(vécu)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지된 것(conçu)과 지각된 것(perçu)을 폐기했다. 사람들은 고통받는 이에게 그가 일반 이익이나 진리의 이름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백방으로 증명한다. 말하자면 굴욕을 당한 이에게, 사람들은 굴욕과 겸손의 미덕이 그의 운명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고통, ‘나의’ 굴욕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을 명료하게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정서적(affectif) 결과가 핵심이 되고,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전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료함이 ‘주체’나 ‘감정’의 개념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통의 도덕적 정당성, 굴욕의 이데올로기적 합법성 이후에 도래하는 시적 사실이다. 체험은 깊어지고 어두워지며, 심오해진다. 체험은 스스로 선언하고 발언권을 요구하며, 그것을 쟁취한다. 체험은 시와 노래, 음악, 춤으로 말한다. 체험은 또 다른 변신을 북돋운다. 그에 따라 고통이 기쁨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