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오네스코의 베랑제 연작 중 한 편인 〈왕은 죽어 가다〉(1962)는 누구에게나 공통이랄 수 있는 한 인간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태도 및 과정을 때로는 비장하게, 또 때로는 희극적으로 보여 주는 명작이다.
왕 베랑제 1세는 극 서두에 이미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첫 번째 왕비 마르그리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냉정하게 알리고, 시의(侍醫)는 과학적 진단을 통해 이를 확인시킨다. 반면 두 번째 왕비 마리는 왕을 위로하며 끝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다.
왕은 죽음을 부정하고 저항하며 회피하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결국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왕국은 점차 붕괴되고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병약해진 왕은 신체 기능은 물론 과거 기억까지 잃어 가다 마침내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죽음을 맞는다.
왕 베랑제는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인류 일반을 상징하며, 그의 죽음은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세계와 우주의 소멸로까지 확장된다. 이오네스코는 이러한 의미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독특한 연극적 수법들을 사용했다. 시대와 계급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부조화, 물리적 규모를 극대화하거나 축소하는 과장, 의례적 반복을 활용한 예식적 요소 등은 모두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동시에 작품 세계의 상징성과 보편성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한편 왕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서사의 전개는 부정과 수용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나선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면은 이전 단계의 역행을 포함하면서도 점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다. 이런 시간적 리듬이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며 하나의 유기체로서 극적 생명을 완성한다.
200자평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 가다〉는 인간의 죽음과 그 수용 과정을 다룬 부조리극으로, 왕 베랑제 1세가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부정하다 점차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이오네스코는 독특한 연극적 수법을 동원해 죽음을 거부하고 다시 받아들이는 서사를 나선형 구조로 전개해 나가며 극에 유기적 생명력을 부여했다. 베랑제 연작 중 하나.
지은이
외젠 이오네스코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로,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부조리극(不條理劇, théâtre de l’absurde)’이라는 새로운 연극 양식을 개척한 대표적 인물이다. 인간 존재의 불안과 소통 부재, 죽음의 공포 등을 극도로 단순화된 구조와 반복, 언어 파괴를 통해 표현하며, 전통적인 희곡 형식에 도전했다.
대표작으로는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들》, 《코뿔소》, 《의무의 희생자》, 《왕은 죽어 가다》 등이 있으며, 이 중 ‘베랑제’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는 연작은 그의 철학적 사유가 응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언어의 부조리를 다루다가 후기에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주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이오네스코는 사르트르나 카뮈처럼 명확한 메시지를 주기보다 부조리한 상황 자체를 무대에 그대로 드러내 관객 스스로 성찰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과 세계를 비관적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실존적 고통을 유희처럼 재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발휘한다. 1970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전후 현대 연극의 지형을 바꾼 극작가로 평가받는다.
옮긴이
오세곤
오세곤
오세곤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현대 희곡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논문 : 장 주네의 희곡 연구)를 마쳤다. 《배우의 화술》, 《예술강국, 문화대국》, 《연기화술클리닉》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연극 분야 고등학교 교육과정(2009, 2015, 2022) 개발과 여러 종의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 집필을 주도했으며,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과 《엄중한 감시》, 시집 《사형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왕은 죽어 가다》, 《살인놀이》, 《알마의 즉흥극》, 《신붓감》, 장 아누이의 《반바지》, 스트린드베리의 《율리에 아씨》, 하벨의 《청중》,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 등 여러 작품을 번역 출판했다. 〈왕은 죽어 가다〉, 〈우리 읍내〉, 〈체홉의 수다〉, 〈앙드로마크〉, 〈술로먼의 재판〉, 〈갈매기〉, 〈보이첵〉, 〈가라가라〉, 〈가라자승〉, 〈타이터스〉, 〈보이지 않는 하늘〉, 〈뻥짜귀족〉, 〈오 행복한 날들〉, 〈하녀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1996년 가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2020년 8월까지 연극무용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20년 9월부터는 같은 대학교 명예교수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차례
옮긴이 일러두기
나오는 사람들
왕은 죽어 가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마르그리트 : 이제 아무도 당신을 안 불러요, 그 꽃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냄새를 맡고 버리세요. 그 냄새도 잊으세요. 이젠 말도 필요 없어요. 누구한테 말을 걸겠어요? 네, 그거예요. 한 발, 또 한 발. 구름다리예요. 현기증이 나도 겁내지 마세요. (왕은 왕좌 계단 쪽으로 나아간다.) 몸을 세우세요. [이젠 막대기 필요 없어요. 갖고 있지도 않고요.] 숙이지 마세요. 절대 넘어지지 마세요. 올라가세요. 올라가세요. (왕은 서너 개의 왕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더요 더 올라가세요. 더요. 더. 더. (왕은 왕좌 바로 앞에 이른다.) 이쪽으로 돌아서세요. 날 보세요. 날 꿰뚫어 보세요. 이 영상 없는 거울을 보세요. 몸을 똑바로 하고… 다리를 주세요. 오른쪽. 왼쪽. (마르그리트의 명령에 따라 왕은 사지를 뻣뻣이 한다.) 손가락을 주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오른팔을 내놓으세요. 왼팔. 가슴. 양 어깨. 배. (왕은 마치 석상처럼 굳은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 됐어요. 이젠 말할 필요도 없고, 심장이 뛸 필요도 없고, 숨 쉴 필요도 없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었죠? 자, 이제 자리를 잡으세요.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