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부정의에 포위된 여성을 위한 비판이론
정의와 돌봄으로 ‘식인 자본주의’에 맞서다
여성들은 잘못된 분배, 문화적 무시, 정치적 배제라는 삼차원적 부정의에 시달린다. 이 중 하나에만 집중하는 해결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모든 사회운동의 의제를 잠식한 인정투쟁은 갈수록 악화하는 경제적 양극화 문제를 놓치고 만다. 한편 이윤 추구를 극도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사회는 주기적으로 돌봄의 위기를 초래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우리는 맞벌이 가정이 겪는 심각한 돌봄 위기를 마주했다. 삶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다층적 억압과 제 살을 깎아 먹는 ‘식인 자본주의’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그 해답은 프레이저의 비판이론에 있다.
이 책은 비판적 정의론과 돌봄 이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프레이저의 비판이론을 열 가지 키워드로 소개한다. 프레이저가 왜 정체성 모델에서 지위 모델로의 전환을 꾀했는지, 돌봄 위기를 타개할 대안으로 제시한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이란 무엇인지, 소수만을 위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맞서는 ‘99퍼센트 페미니즘’이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지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정체성의 경계가 강화되는 시대에 정의와 돌봄을 위한 연대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
여성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 뉴욕 뉴스쿨(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in New York)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1980년에 뉴욕시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초기에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과 미셸 푸코의 계보학에 토대를 둔 비판이론을 전개했다. 이후 악셀 호네트와 논쟁하면서 인정뿐 아니라 분배, 나아가 정치적 대표 문제까지 함께 고려하는 비판적 정의론으로 나아간다. 여성철학자로서 특히 자본주의의 위기, 재생산과 돌봄에 관한 논의에 관심을 둔다. 비판이론 형성의 궤적과 논쟁을 둘러보기에 좋은 저서로는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Adding Insult to Injury: Nancy Fraser Debates Her Critics)≫이 있으며, 최근에 번역된 ≪좌파의 길(Cannibal Capitalism)≫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돌봄 위기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살펴볼 수 있다.
200자평
낸시 프레이저는 비판이론을 혁신한 여성철학자다. 정체성 모델을 지위 모델로 전환해 분배와 인정을 아우르는 비판적 정의론을 정립했다. 무분별한 이윤 추구로 사회적·생태적 재생산을 위협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돌봄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정체성의 경계가 강화되는 시대에 정의와 돌봄을 위한 연대의 실천을 모색한다.
지은이
이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교수다. 사회철학과 여성철학을 전공했다. 200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인정 이론을 여성주의의 관점과 접목한 논문 ≪여성주의적 정체성 개념(Identitätsbegriffe aus Feministischer Perspektive)≫(여이연, 2007)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도시인문학’이라는 융합 학문 분야를 구축하는 작업에 집중해 왔다. 도시성을 기반으로 친밀 관계와 감정 양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2016년부터는 국내에 새롭게 등장한 온라인 기반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들녘, 2016)을 출간했다. 최근에는 포스트휴먼, 돌봄, 신유물론, 성차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심화하고 있다. 공역서로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사월의책, 2011)과 낸시 프레이저의 ≪모욕과 불평등을 넘어≫(그린비, 2016) 그리고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아카넷, 2024) 등이 있다.
차례
낸시 프레이저와 비판이론
01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의 사회운동
02 분배냐 인정이냐
03 변혁적 개선책
04 정치적 대표 가능성
05 지위 모델
06 자본과 돌봄의 모순
07 의존의 재구성
08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과 돌봄 전환
09 식인 자본주의와 전환의 정치
10 99퍼센트 페미니즘 선언
책속으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돌봄 이론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시작하지만 99퍼센트를 위한 실천으로 나아간다. 99퍼센트의 인간을 위한 정의는 페미니즘 교차성의 관점에서 경제, 문화, 정치, 생태 등 다층적 차원의 억압을 변혁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정책을 마련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실천 속에서 여성들은 다른 억압에 시달리는 소수자들과 연대하며, 이로써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실현한다. 실천 과정에서 여성들은 집단 정체성을 고수하기보다 집단 구분에 따른 위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_“낸시 프레이저와 비판이론” 중에서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무시 양자의 문제는 긴밀하게 얽혀 있다. 여성 노동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문화적 위계 탓에 경제적으로도 저평가되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탓에 쉽게 성적 대상화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양육과 가사노동 같은 여성 노동은 핑크 노동으로 간주되며 낮은 임금을 받는다. 돌봄과 재생산노동은 저임금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며 생산노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프레이저는 이런 맥락에서 ‘여성’을 이가적 집단으로 설명한다.
_“02 분배냐 인정이냐” 중에서
정체성 모델에 따르면 인정 욕망은 타자가 나의 정체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평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가 보기에 인정 욕망이 이런 의미라면 그것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정체성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있다 해도 자아와 타자 모두에게 완벽하게 인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이저는 정체성 중심적이지 않은 인정의 의미를 주장한다. 즉 인정을 정체성을 만들거나 지키거나 평가하는 일로 보는 대신 “지위 종속에 대항하는 저항으로, 따라서 정의 주장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요컨대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에서 인정이란 지위 종속을 낳는 위계적 문화를 탈제도화하고 참여 동등을 장려하는 패턴으로 교체하는 일이다. 여기서 어떤 것이 여성에게 더 좋은 인정인지는 ‘누가 여성인가’, ‘여성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어떤 것이 개별 여성들에게 더 평등한 상호작용의 지위를 부여하는가’를 물을 때 탐구될 수 있다.
_“05 지위 모델” 중에서
프레이저는 의존을 종속이 아니라 관계로 해석한다. 재생산과 돌봄은 종속이 아니라 인간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시작이다. 누구도 돌봄이라는 의존 관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의존은 나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프레이저가 이렇게 의존을 새롭게 해석하는 이유는 그가 돌봄을 부정적 의미에서의 의존으로부터 떼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돌봄은 생산하는 자를 돕는다. 따라서 관계를 만들어 내는 돌봄은 종속적이지 않으며,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오히려 종속적인 것은 임금 노동이다. 기존 생산노동은 자신의 돌봄 의존성을 인정해야 한다.
_“07 의존의 재구성” 중에서
프레이저에 따르면 돌봄을 위한 공적 지원이 사라져 가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사회, 탈산업 사회에서 노동 운동의 주체는 바로 돌봄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식인 자본주의가 자신을 지탱하는 재생산노동을 얼마나 착취하는지 비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돌봄을 회복할 때 자본주의의 위기가 제대로 극복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_“09 식인 자본주의와 전환의 정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