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공지능은 무엇을 ‘여전히’ 하지 못하는가
현상학으로 밝힌 인공 지성과 인간 지성의 미래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열광과 두려움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인공지능이 어떤 지성인지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인공 이성 비판’은 일찍이 그러한 철학적 고찰을 선도했다. 초기 인공지능의 실패에서 유서 깊은 계산주의적 지성관을 발견하고, 현상학에 기반해 계산적이지 않은 인간 지성의 특징을 설명했다. 드레이퍼스의 고찰은 20세기 후반의 인공지능에 초점을 맞추지만, 신경망 인공지능을 위시한 현재의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풍성한 통찰을 제공한다. 공학적·기술적 층위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지성을 검토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드레이퍼스의 인공 이성 비판 작업을 열 가지 키워드로 탐색한다. 초기 인공지능의 이념과 역사, 그 저변에 흐른 계산주의적 지성관의 연원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계산적인 인공지능이 구현하지 못하는 인간 지성의 세 가지 특성, 세계성·신체성·목적성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목적을 창조적으로 발견하면서 신체적으로 과제를 수행한다.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이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 인공 일반 지능에 이를 수 있을까? 드레이퍼스를 따라 인공지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해 보자.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 1929∼2017)
AI 연구 초기부터 ‘인공 이성 비판’ 작업을 행한 철학자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MIT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주된 연구 분야는 현상학과 IT 기술 검토였다. 초기 AI 연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담은 ≪컴퓨터가 하지 못하는 것: 인공 이성 비판≫(1972)으로 큰 논쟁을 야기했으나, 이후 AI 연구의 흐름이 그 통찰을 확증했다. ≪기계에 대한 정신의 우위≫(1986, 스튜어트 드레이퍼스와 공저), ≪인터넷의 철학≫(2001) 등에서 AI와 IT기술에 대한 비판 작업을 계속했다. 순수 철학서로는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1982, 폴 라비노프와 공저), ≪세계-내-존재≫(1990), ≪모든 것은 빛난다≫(2011, 숀 켈리와 공저), ≪실재론 되찾기≫(2015, 찰스 테일러와 공저)가 있다.
200자평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인공지능 고찰의 새 지평을 연 철학자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의 실패 원인으로 계산주의적 지성관을 지목하고 현상학에 기반해 인공지능이 구현하지 못하는 인간 지성의 특성을 밝혔다. 이 책은 열 가지 키워드로 드레이퍼스의 인공 이성 비판 작업을 해설한다. 현재의 AI에서 무엇이 기대될 수 있고 무엇이 여전히 극복되어야 하는지 탐색할 수 있다.
지은이
최일만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단독성과 자기이해: 진정성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건국대학교 모빌리티인문학 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있으며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에 출강 중이다. 현상학을 통한 윤리론 연구와 현대기술문명 검토에 관심을 두고 있다. 논문으로 “존재 너머의 일자로서의 주체: 신체적 주체성에 관한 레비나스의 사유”(2025), “Dangers and Potentialities of the Highly Mobile World: An Ethical Consideration”(2021) 등이 있다. ≪망상의 역설≫(2025), ≪다보스에서의 결별: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갈림길≫(2022), ≪존재와 운동≫(2021), ≪인터넷의 철학≫(2015) 등 현상학과 대륙철학에 관한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차례
AI에 대한 현상학적 반성
01 생각하는 기계
02 컴퓨터가 하지 못하는 것
03 계산주의적 지성관
04 계산주의적 지성관을 위한 가정들
05 인간의 세계성
06 인간의 신체성
07 인간의 목적성
08 기량
09 GOFAI의 한계와 직관적 기량의 상실
10 신경망 AI와 AI의 미래
책속으로
열광에도 두려움에도 치우치지 않고, AI가 우리 삶에, 사회에, 세계에 무엇을 가져올지 고찰하는 것이 학문의 임무일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AI, 인공적 지성이 어떤 지성인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것이 어떤 지성인지에 따라 우리가 AI에 기대하고 예상할 수 있는 바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또한 인간 지성이 어떤 지성인지 이해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현재까지 우리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지성이 인간 지성인 한, AI가 어떤 지성인지 밝히는 작업은 우리의 지성에 비추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의 지성과 인간 지성에 대한 철학적 반성 작업, ‘인공 이성 비판(critique of artificial reason)’이다.
_“AI에 대한 현상학적 반성” 중에서
본질적인 것의 식별은 문제를 푸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가령 배 하나로 사람과 사자를 강 건너편으로 옮기는 문제를 풀려 한다면, 여기서 배의 속도가 비본질적임을 알아야 한다. 반면 이동 시간을 고려해야 하는 다른 문제에서는 배의 속도가 본질적일 것이다. 이를 식별하지 못한다면 AI는 문제 풀이 과정에서 비본질적 요소들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AI 설계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별을 프로그램에 미리 탑재했다. 이로써 AI 프로그램은 해당 과제에서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 지성의 핵심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 자체에 있다. 이 능력은 설계자들이 보유하고 컴퓨터는 갖지 못한 것으로 남겨졌다.
_“02 컴퓨터가 하지 못하는 것” 중에서
수많은 몰입적 경험을 통해 전문가는 상황 파악과 대처의 엄청나게 거대한 레퍼토리를 보유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기량은 마치 그의 몸이 된 것 같다. 그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기량 있는 행위를 한다. 전문적인 운전자는 차와 도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대응한다. 이에 따라 그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커브를 돌거나 멈출 수 있다. 프로 체스 선수들은 수 초 안에 행보를 할 때에도 실력 감소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수준의 기량에서 행위는 더 이상 문제 풀이가 아니다. 전문가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위를 할 뿐이다.
_“08 기량” 중에서
만약 특정한 용도를 위한 도구로서 AI를 넘어 AGI를 목표로 한다면, 우리는 신체성을 고려해야 한다. AGI는 더욱 충만한 세계를 가져야 하고, 목적의 창조적 발견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신체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지성을 지닌 AI, 즉 AGI는 신체화된 AI에 이르러서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엔비디아, 테슬라 등 AI 테크놀로지 기업들이 신경망 AI를 탑재한 로봇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신체화된 AI가 사회에 가져올 충격은 신경망 AI가 준 것보다 훨씬 클 것이며, 우리는 이 충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_“10 신경망 AI와 AI의 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