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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식민지 조선에 머물렀던 것은 연희전문 시절의 고작 4년 여.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죽기까지 시를 발표한 적도 시인으로 공인받은 적도 없습니다. 문단 활동이 없었던 그가 공식 문학사에 편입된 것은 1970년대 중반입니다. 1985년, 한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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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윤동주 시선≫
릿쿄대학이 80주기를 맞아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세웠습니다. 도시샤대학에 이어 일본에 세워진 두 번째 시비입니다. 릿쿄대학은 〈쉽게 씨워진 詩〉를, 도시샤대학은 〈序詩〉를 새겼습니다. 각 대학을 다니며 쓴 시입니다. 윤동주 시를 관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의 미학은 윤동주가 이룬 한국 시사의 큰 수확입니다.
윤동주 지음, 노승욱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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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함께 있는 것은, ≪정지용·윤동주 동시선집≫
습작기 시에는 정지용의 영향이 뚜렷합니다. 갓 스물을 넘긴 그는 《정지용 시집》을 읽으며 “걸작이다”, “이게 문학자 아니냐”고 메모했습니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생 윤동주는 사숙해 왔던 시인 정지용의 자택을 방문합니다. 시(詩)에 대해 이야기하고 헤어져 이후 직접적인 교감은 없었습니다. 내객이 많았던 정지용이 윤동주를 기억했을까. 훗날 정지용은 유고시집의 서문을 씁니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해 본 적도 없이!”
정지용·윤동주 지음, 김용희·이준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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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고석규 평론선집≫
전쟁에서 돌아와 부산대학 국문과생이 되었던 고석규. 공식 문학사가 다루기 전부터 윤동주에게 주목했던 비평가입니다. 그에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자화상이었습니다. 윤동주가 식민지를 젊은 수인(囚人)으로 살았다면, 자신은 임시 수도 판자촌 서재에 유폐되어 있다는 감각.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1953.9)에서 시대적 조건을 덜어낸 전체가 곧 고석규론입니다. 고석규가 그러했듯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고석규 지음, 남송우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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