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제 열정은 시체입니다
〈그대가 내 무덤 위를 지날 때〉는 작가 특유의 오토 픽션 기법과 메타 연극적 구조가 극대화된 그의 대표작으로, 세 등장인물의 만남은 욕망과 금기,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교차하는 미묘한 장면들로 이어지며 ‘죽음’의 의미를 여러 층위로 확장한다. 주인공 ‘나(세르히오)’는 절망이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그것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죽음을 준비한다. 스위스와 런던을 오가며 죽음을 설계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시체를 런던의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있는 시체 성애자인 ‘칼레드’에게 기증하기로 약속한다. 칼레드는 청소년기부터 시간(屍姦) 행위를 하다 체포되어 10년 수감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나’는 스위스의 조력 자살 병원에서 ‘고드윈 박사’를 만나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 이 작품은 죽음과 육체에 매혹되는 네크로필리아(시체 성애자)와 조력 자살이라는 윤리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며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으로 그리는 것을 경계하고, “공포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죽음 속에서도 욕망을 찾는”(2020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인터뷰) 감정의 낭만적이고 복합적인 지대를 드러낸다.
예술에서 우리는 죽은 것들과 사랑에 빠집니다
극은 자전적 요소와 연극성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독창적 구조를 갖는다.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등장해 각자의 죽음을 증언하듯 말하고 리허설과 공연, 허구와 현실은 수시로 뒤섞인다. 그 속에서 관객은 무대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죽음의 증인’으로 초대된다. 작품은 죽음을 소재로 하지만 결국 생에 대한 욕망과 상상, 종교적 상징과 정치성, 자기 고백적 진실이 뒤얽힌 ‘죽음의 메타극’에 가깝다. 블랑코 특유의 감각적 언어와 철학적 사유는 삶의 유한성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다. 시신 기증, 죽은 신체의 소유권,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주체성 문제를 대담하고 섬세하게 다루며, 서문에서 작가는 아침마다 소량의 혈액을 잉크로 희석해 일곱 시간씩 손으로 쓰는 방식을 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피로 쓰인 언어’는 그 사실 자체로 육체적인 몰입과 고통을 증폭하며, 이 과정은 글쓰기가 곧 몸의 행위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작품 곳곳에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소환해 생명·창조·파괴라는 주제를 풍부하게 만들고, 각 인물이 상징하는 종교와 남성성의 위기라는 주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대가 내 무덤 위를 지날 때〉는 감정적 깊이와 사유의 밀도를 고르게 담아내며 죽음의 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비추는 현대 연극의 수작이다.
200자평
〈그대가 내 무덤 위를 지날 때〉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한 인물의 여정을 따라가며 조력 자살과 시체 성애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매우 독창적이고 강렬한 희곡이다. 죽음과 죽음 이후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상상을 대담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풀어내며, 삶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을 환기하는 ‘죽음의 메타극’이다. 세르히오 블랑코는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주요 연극상을 다수 수상하며 국제 무대에서 예술적·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오토 픽션 기법과 메타 연극적 구조가 극대화된 그의 대표작으로, 2019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초연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지은이
세르히오 블랑코
세르히오 블랑코(Sergio Blanco)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는 스페인어권 현대 극작가다. 1971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연출을 공부하고 전적으로 희곡 집필과 연출 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현대 공연 예술단 컴플롯(COMPLOT)의 감독을 맡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도살(Slaughter)〉, 〈45구경 권총(45’)〉, 〈키예프(Kiev)〉, 〈야만(Barbarie)〉, 〈카산드라(Kassandra)〉, 〈다윈의 도약(El salto de Darwin)〉, 〈테베랜드〉, 〈오스티아(Ostia)〉, 〈나르키소스의 분노(La ira de Narciso)〉, 〈코비드 451(COVID‑451)〉, 〈뒤셀도르프의 포효(El bramido de Dusseldorf)〉, 〈그대가 내 무덤 위를 지날 때〉, 〈죽음의 기념(Memento mori)〉, 〈동물원(Zoo)〉 등이 있다.
세르히오 블랑코는 자기 자신과 세계, 진실과 허구,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연극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대 대표 극작가로 그의 연극은 현대 연극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연극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출판되고 공연되었으며, 극작과 연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세미나와 강의를 하는 등 학술 활동도 활발히 병행하고 있다. 2013년 우루과이 국립극단의 초청을 받아 1년 동안 국립극단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2014년 우루과이 국립무대예술학교에서 오토 픽션을 주제로 연극 연구를 진행했다.
옮긴이
김선욱
김선욱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국립대학교(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스페인 연극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연극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무대에 올리는 한편 드라마투르그(문학 감독)와 연극 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공연 예술》(공저), 《작품으로 읽는 스페인 문학사》(공저) 등과 역서로 《누만시아》, 《살라메아 시장》, 《푸엔테오베후나》, 《죽음 혹은 아님》 등 다수가 있다. 논문으로는 〈연극사 각 시대별 연기 양식 비교 연구 : 음악적 대사의 연극적 재현의 역사〉, 〈르네상스와 바로크 과도기 시기 스페인 연극의 관객 : 또레스 나아로를 중심으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연극과 연극 축제〉 등과 평론으로 〈젊은 작가와 극단의 재기발랄한 놀이 : 극단 이상한 앨리스의 변기 속 세상〉, 〈사회적 폭력에서 잉태된 개인의 폭력, 그리고 그 치유에 대한 희망 : ‘주인이 오셨다’의 텍스트 구조와 의미〉, 〈‘마호로바’의 미덕 : 그 구조와 연기 앙상블〉 등 다수가 있다. 이 외에도 〈번역극의 드라마투르그 임무와 역할〉과 같은 연극과 관련한 문화 칼럼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서문
1막
2막
3막
비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 : 그날 오후에 런던 수족관을 방문하러 갑니다. 몇 시간 동안 수족관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유명한 백상아리가 있는 거대한 수조를 발견합니다. 거기서 그걸 바라보다, 이런 형태의 사랑이 아마도 가장 너그러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는 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줄 것이고, 저 또한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 자신을 내어줄 것입니다. 마음에 듭니다.
83-84쪽
나 : 칼레드, 그대가 내 무덤 위를 지날 때, 나는 내 무덤 안 깊은 곳에서 간절한 열망에 사무쳐 나는 내 수의를 찢을 거라오.
90쪽
“예술에서 우리는 죽은 것들과 사랑에 빠집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에. 터너의 바다의 움직임은 영원히 멈춰 있습니다. 베르니니가 조각한 아폴로의 표정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어 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몸은 무생물입니다. 그리고 모네의 수련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걸 좋아하고 매혹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재를 죽이는 것밖에 하지 않는 작품들을 몇 시간이고 바라봅니다. 그것은 실재를 얼리는 것입니다. 실재를 영원히 응고시키는 것입니다. 피부는 대리석으로, 웃음은 돌로 변합니다. 예술보다 더 죽은 것은 없습니다. 삶과 더 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세르히오 블랑코.”
108-109쪽
고드윈 박사 : 하루 뒤에 우편물이 제게 도착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였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 무덤을 지나가지 마오, 그대가 내 고통을 잊었다는 사실만큼 내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을 거라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숨을 거두는 이 순간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내 무덤을 찾아와 흐느껴 주오.”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