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작가의 일기≫는 1873년, 1876∼1877년, 그리고 1880∼1881년에 도스토옙스키가 독자적으로 발간한 월간지로, 실험적인 저널리즘 양식을 통해 자신의 미학적·철학적 견해를 밝히고자 한 특수한 장르 실험이었다. 이 잡지는 콩트, 사회·정치 평론, 수기, 소설 등을 혼합한, 장르와 문체의 실험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궁극적 사상과 사회의식 그리고 미학을 보여 주었다. 또한 한 사람이 쓴 다양한 장르의 여러 가지 글을 모아 월간지 형식으로 발간한 세계 문화사에서 희귀한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러시아 민중의 삶과 함께, 러시아와 유럽의 문제를 포함해서 당대 정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본주의 문명의 위악적·인위적 본질과 함께, 사회주의의 비인간적인 면모와 잔인성을 갈파했다. 특히 당대 유행을 좇아 유럽을 여행하고, 유럽을 동경하는 각계 귀족, 지식층 러시아인들의 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허영과 위선에 가득 찬 러시아 상류층에 대한 자괴감이 바탕을 이룬다. 또한 그는 19세기 후반 급격한 산업화·서구화 과정 속의 러시아 사회의 분열과 지나친 배금주의를 경계하는 한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일으키는 갈등의 원인과 진행 과정, 그리고 그 비극적 전망까지 예언하고 있다.
≪작가의 일기≫는 첫 출간 이후 회를 거듭할수록 주로 사회적 이슈의 숨겨진 의미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주요 매체가 되어 작가를 시대의 선지자 또는 예언자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대화적 기법에 의한 ≪우스운 인간의 꿈≫, ≪보보크≫, ≪온순한 여자≫와 같은 순문학 작품을 이 잡지 속에 포함시키는가 하면, 정치·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평론 속에 심오한 통찰과 강변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독자에게서 존경과 찬사, 때로는 격렬한 반발과 비판이 담긴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답변과 논쟁을 다시 이 잡지에 게재해서 독자와 대화의 장을 열어 갔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나아가 시대를 이끌고자 한 것이며, 선구적 소설 미학과 함께 자신의 주요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적 사유 체계를 저널리즘 속에서 특이한 문체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데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미학·정치·역사·사회·교육 등 주요 담론별 주요 작품, 또는 평론, 소품 등을 초기(1873)와 중기(1876∼1877), 후기(1881) 작품 중심으로 가장 중요한 그의 이념과 미학, 문제가 되는 평론, 그리고 현대적 감각에 맞는 글을 꼭지별로 발췌했다.
200자평
<작가의 일기>는 1인 집필 저널 속에 콩트, 사회·정치 평론, 수기, 소설 등을 혼합한, 장르와 문체의 실험을 통해 작가의 궁극적 사상과 사회의식 그리고 미학을 보여주는 결정판으로, 한 사람이 쓴 다양한 장르의 여러 가지 글을 모아 월간지 형식으로 발간한 세계 문화사에서 희귀한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어느 소설에서보다 작가 자신의 통합적·예지적 담론과 관념의 깊이와 다양성을 보여준다.
지은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을 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역자는 이렇게 말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을 할 것이다.
옮긴이
이길주
이길주
이길주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미국 몬터레이 인스티튜트 오브 인터내셔널 스터디(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석사 과정 후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가의 일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이르쿠츠크국립대학교 교환교수, 일본 북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소 연구교수, 한국시베리아학회 회장, 유라시아 문화연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한양대학교 중소연구소 상임연구원, 외대 통역대학원 강사를 거쳐 배재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논문으로는 〈도스토옙스키와 시베리아〉, 〈도스토옙스키의 민족주의와 반유토피아 사상〉, 〈시베리아 연구의 역사〉, 〈Siberia-Asia : Dostoevsky’s “Regeneration” and Ideas within Eurasian Spatial Images〉 등이 있다. 한국 한류의 근원 문제와 시베리아,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와 함께 시베리아와 유라시아의 역사와 정체성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 예지와 명언》, 《동시베리아의 역사, 정치, 경제》(이르쿠츠크 국립대학교 출판부), 《한류와 유라시아 말춤》 등이 있으며 공저로 《시베리아 개발은 한민족의 손으로》,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 및 편역서로 《고조선》, 《대리석》, 《끄르일로프 우화집》,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인상기》, 《작가의 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러시아 지역 연구》, 《러시아의 역사 1》, 《러시아, 러시아인》, 《실무 러시아어 강독》 등이 있다. 이 외 문학 및 문화 평론이 다수 있다.
차례
1873년 서문
옛 사람들
공상과 환상
농부 마레이
유럽에 관한 공상
논점의 혼란과 불확실성
역설가
조르주 상드의 죽음
조르주 상드에 관한 몇 마디
국외여행, 기차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에 대한 몇 마디
땅과 아이들
어떤 돼지에 대한 크릴로프의 오래된 우화
게오크테페, 우리에게 아시아는 무엇인가?
질문과 응답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오스트롭스키의 희극에 나오는 못 배운 장사꾼이라면 몰라도. 예를 들어, 돈으로 학교를 얼마든지 세울 수는 있지만 교사를 당장 양성해 낼 수는 없다. 교사 문제는 꽤 미묘한 것이며, 참다운 국가적, 민족적 교육자는 몇 세기에 걸쳐 전통과 수없는 경험이 뒷받침되어 양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돈의 힘으로 교사뿐만 아니라 학자까지도 줄줄이 만들어낸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떨까?
2.
상드는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며,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이상주의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힘차고 자신감이 넘치는 한편 너무나 모호한 이상과 지극히 불가능한 희망으로 가득 찬 병적인 금세기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성스러운 기적의 나라’에서 생겨나, 영원히 창조 과정에 있는 우리 러시아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상과 너무나 큰 사랑, 신성하고 고결한 열망과 살아 있는 생명력, 그리고 소중한 신념을 유인해 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불평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인은 그러한 이름을 추앙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참다운 사명을 실천했으며,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
3.
−우리는 유럽에서 식객이고 노예였지만,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주인이 됩니다. 유럽에서 우리는 타타르였으나,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유럽인들입니다. 아시아에서 우리의 임무는 문명 보급자로서의 사명의 실천이며,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고 그곳으로 우리를 끌어들일 것입니다. 단지 첫 출발이 필요할 뿐입니다. 단지 2개의 철로를 부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는 시베리아로,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로, 그러면 곧 그 결과가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