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차르를 분노케 하고 러시아 지식인을 일깨운 ‘미치광이’의 편지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유혈 진압된 후,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의 철저한 감시와 검열 아래 놓였다. 지식인들은 침묵했고 사유는 정체되었다. 러시아의 밤이 계속되던 1829∼1831년, 표트르 차다예프는 총 여덟 통의 편지를 쓴다. 그는 원고를 가까운 지인에게만 보여 주었고, 사교계에 이 원고들이 은밀히 돌아다녔다. 그러다 1836년 문예지 《망원경(Телескоп)》에 첫 번째 편지가 공식 발표되자 가공할 파장이 일어났다.
차다예프는 이 첫 번째 편지에서 ‘러시아는 과거 그 어디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없고, 인류 발전에 눈곱만큼도 기여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이다’라고 러시아의 현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발표 직후 차다예프가 지적한 현실의 최정점에 있던 황제는 불같이 분노했다. 글을 실은 문예지는 곧바로 폐간되었고, 편집자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검열관은 재직 중이던 대학에서 면직되고 1년 징역형에 연금까지 몰수됐다. 글쓴이 차다예프는? 명문 귀족 가문 출신에 군인 출신이자 사교계의 댄디였던 표트르 차다예프는 공식적으로 ‘정신이상자’로 규정되었다. 매일 의사가 찾아와 정신 상태를 검진했고, 산책은 하루 한 번 허용되었다. 그 여파로 차다예프는 써 놓은 나머지 일곱 통의 서한을 발표하지도 못했거니와 이후 집필한 다른 저작들 역시 생전에 출간하지 못했다. 여덟 통의 편지 원고는 여러 장소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흩어졌고 간신히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데에 100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러시아 정체성 논의의 사상적 기점이 되었으나 불운을 면치 못한 이 귀한 책을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어두운 밤에 울린 한 발의 총성
19세기 러시아 주요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회고록 《과거와 사고(Былое и думы)》에 “차다예프의 ‘편지’는 일종의 마지막 말이자 경계선과 같았다. 그것은 어두운 밤에 울린 총성과 같았으며, 무엇인가가 가라앉으며 멸망을 알리는 소리였는지, 신호였는지,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었는지, 새벽의 소식이었는지, 혹은 새벽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알림이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깨어나야 했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차다예프의 〈제1서한〉에 따르면, 유럽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놓고 상호 연결된 국가들이 연대하면서 문명의 발전을 주도하는 반면, 러시아는 노예적 굴종과 타락이 판치는 죽은 자의 도시가 되었다. 만일 차다예프의《철학 서한》이 〈제1서한〉으로 끝났다면 한때 러시아를 들썩이게 했던 어느 괴짜의 현실 한탄을 담은 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비판에 멈추지 않고, 현실 문제를 그 원인부터 조밀하게 따져 진단하고 그 대안을 철학적 담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철학 서한》에서 차다예프는 종교와 철학을 결합하여 러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고자 했다. 근대 철학의 여러 결과물을 활용하면서 논리적 냉정함을 유지했고, 여기에 종교적 가르침을 쌓았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중심에 놓고, 왜 기독교 가르침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 가르침을 인지할 수 있는가 하는 논리를 구축했다.
이 책은 이후 러시아 지성사에서 전개되는 슬라브주의ᐨ서구주의 논쟁, 즉 러시아 정체성과 러시아 미래의 향방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으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다예프가 뿌린 씨앗은 푸시킨, 게르첸, 도스토옙스키를 거쳐 러시아 문학과 사상의 거대한 강물로 흘러들었다. 《철학 서한》은 러시아의 지성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영원한 고전 중의 고전이다.
200자평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대립의 분수령이 된 표트르 차다예프의《철학 서한》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러시아가 서구 문명과 절연되어 역사적 공백 상태에 있다고 비판하며, 가톨릭적 보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이 책은 이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형성에 사상적 기점이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주요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이 책에 대해 “어두운 밤에 울린 한 발의 총성”이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지은이
표트르 차다예프
표트르 야코블레비치 차다예프(Пётр Яковлевич Чаадаев, 1794∼1856)는 1794년 모스크바에서 부유하고 유서 깊은 러시아의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드미트리 셰르바토프 공작 집에서 귀족식 교육을 받았다. 1807년부터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1808년 6월에 모스크바대학 학생으로 정식 등록하여 1811년 중반까지 학업을 이어 갔다. 대학에서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야쿠시킨, 《지혜의 슬픔》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투르게네프,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ᐨ빌렌스키 등과 교유했다. 대학 강의와 친교는 차다예프의 사상을 형성하고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차다예프는 독일 사상, 특히 칸트에서부터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주요 내용을 직간접으로 인용하고 반박하고 수긍하면서 《철학 서한》의 뼈대를 만든다.
1812년 5월, 형 미하일과 같이 후견인이자 외삼촌인 드미트리 셰르바토프가 근무했던 세묘노프 근위보병연대에 소위보로 입대한다. 1813년 중위로 진급한 뒤 세묘노프 연대를 떠나 아흐티르 기병연대로 자리를 옮긴다. 1812년 6월 12일 조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로디노 전투, 타루티노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고, 쿨름 전투와 파리 점령에도 참전한다. 그 공로로 성 안나 4급 훈장, 프로이센 공훈 훈장, 쿨름 십자장을 받는다.
조국전쟁이 끝난 후 1816년 차르스코예 셀로에 주둔하고 있던 레프 근위기병연대에 전속된다. 이곳에서 카람진의 저택에 드나들면서 여러 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푸시킨과의 만남도 이때였다. 푸시킨은 차다예프에게 상당한 감명을 받아 〈차다예프에게〉라는 시를 남긴다. 1817년 23세의 차다예프는 근위대 사령관의 부관으로 임명되고, 1819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던 1820년 10월 근무하던 기병연대에서 반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1820년 12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1821년 2월 불명예제대를 한다.
이후로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멋쟁이, 푸시킨의 용어 사용법에 따르면, 댄디로 주목받는다. 조국전쟁에서의 빛나는 전훈 그리고 유럽을 직접 목도한 인물, 거기다 예술적 옷차림과 학식, 당시 사교계 사람들은 차다예프를 두려움 섞인 존경으로 바라보았다.
1822년 형 미하일과 유산을 나누고, 1823년 건강 회복을 위해 외국 여행길에 오른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에도 머무나 건강이 악화돼 1826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다. 여행 중 1825년 카를스바트에서 셸링과 만난다. 셸링과의 만남은 《철학 서한》을 비롯한 차다예프의 철학적 인식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1820년대 중반 서유럽으로의 여행을 기점으로 차다예프의 사고는 계몽주의적 성격에서 종교철학적 세계관으로 전환된다. 1826년 러시아로 돌아오던 길에 차다예프는 데카브리스트들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국경선 근처에서 체포된다. 니콜라이 1세의 명령으로 차다예프는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그는 어떤 비밀 결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으며, 북부결사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완강히 거부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실패는 차다예프가 기존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셸링과 프리메이슨 사상이 그 빈자리를 메꾼다. 차다예프 철학은 이제 종교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가 융합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1826년 7월에 국경선 근처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40일 만에 풀려난 차다예프는 9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그해 10월 4일 드미트로프현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의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는 레뱌세프 가문의 저택과 드미트로프 영지 사이를 오가며 생활한다.
시골 영지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생활하면서 1829년에서 1831년 사이 《철학 서한》을 집필한다. 1836년 《철학 서한》의 〈제1서한〉이 문예지에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몰아쳤다. 니콜라이 1세의 진단에 따라 당국은 차다예프를 ‘정신이상자’로 공식적으로 규정했고, 차다예프는 모스크바 경찰 당국에 출석하여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통보받는다. 그 후 매일 의사가 찾아와 정신 상태를 검진했고, 산책은 하루에 한 번만 허용되는 등 사실상 가택 연금에 놓인다. 이 조치는 1837년에 일부 완화되었으나 더는 글을 쓰지 말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철학 서한》의 나머지 일곱 편의 서한은 그의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다. 니콜라이 1세는 그를 정신병자로 낙인을 찍었고, 당국은 재빠르게 그를 정신이상자로 세상에 공표했다. 마치 낙인이론의 설득력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다예프도 비아냥거리듯이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듬해에 쓴 《미치광이의 변명(Апология сумасшедшего)》(1837)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차다예프는 계속 모스크바에 머물렀고, 말쑥한 옷차림으로 사교계에 출입했고,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호먀코프, 게르첸, 키레옙스키, 악사코프 등과 친교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불편해했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상가는, 게르첸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슬픈 비웃음을 달고 살았다. 크림 전쟁(1853∼1856) 이후에는 자살을 결심했다고도 전해진다. 185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도네스코이 수도원 내 공동묘역에 안장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옮긴이
안동진
안동진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북 고창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참 좋아했다.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그리고 《삼국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문과를 가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선택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설정에 한몫을 단단히 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노어과를 선택했지만 문학의 길을 고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투르게네프의 주관의 미학〉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투르게네프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청주대학교, 호서대학교 등에서 러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쳤다. 청주대 한국문화연구소,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한국외대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지금은 국민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비상임연구원으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2》(공역), 《북아시아 설화집 2》, 《체호프 아동소설선》 등이 있다.
차례
제1서한
제2서한
제3서한
제4서한
제5서한
제6서한
제7서한
제8서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문제는 우리가 다른 민족과 함께 걸어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유명한 흐름 중 어느 하나에도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서양에도 동양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전통이든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간의 밖에 서 있는 것이죠. 인류의 보편적인 교육은 우리에게 와 닿지 못했습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 인간 정신의 놀라운 연결, 그리고 전 세계를 거쳐 인간의 정신을 현재 상태로 이끈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
활동이 저 경계를 넘어 뛰어가던 시기, 민중의 도덕적 힘이 들끓듯이 뛰놀던 시기, 이런 시기와 유사한 어떤 것도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활력도 없고 에너지도 없는 둔하고 암울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오직 사악한 행동에만 반응하고 노예적 굴종에 익숙해진 존재들만 가득 차 있는 시기, 이것이 우리 사회가 살아가는 삶의 연령대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매력적인 추억도 매혹적인 형상도 없으며, 국가 전통에서 효과적인 교육 수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모든 세기, 우리가 차지한 모든 공간에 시선을 던져 보십시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우리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고 우리의 과거를 생생하게 그림처럼 그려 내는 존경할 만한 기념물 하나, 기억에 붙들어 맬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무난하게 침체된 상태에서 좁디좁은 현재만을 살고 있습니다.
-〈제1서한〉중에서
2.
태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이성의 일부를 우리가 의도적으로 대체한 이 인위적 이성, 우리 눈에 대상을 왜곡하여 보여 주고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그것을 보도록 강요하는 이 악한 이성은 자유보다는 복종이 우선한다는 점과 우리가 만든 법칙이 세계의 보편적 법칙에 종속된다는 점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물의 절대적 질서를 모호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성은 자유를 주어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종속을 물질적 질서의 참된 현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질서의 참된 현실로 인정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모든 능력, 지식의 모든 수단은 그 겸손함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이성이 스스로를 복종시키면 복종시킬수록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인간의 이성 앞에 오직 하나의 문제만이 제기됩니다. 그것은 ‘복종해야 할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제3서한〉중에서
3.
수천 개의 보이지 않는 실이 한 이성적 존재의 생각과 다른 이성적 존재의 생각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생각은 밖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퍼지고 상호 교차하면서 그 생각들은 하나로 합쳐지고, 결합하고, 하나의 인식에서 다른 인식으로 이동하고,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편 이성을 만듭니다. 때로는 드러난 생각이 주변 환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전달되었고 충동이 발생했습니다. 때가 되면 생각은 다른 친숙한 생각을 찾아 흔들어 접촉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생각이 다시 태어나 정신세계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그런 물리적 실험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 개의 쇠구슬이 일렬로 매달려 있습니다. 첫 번째 쇠구슬을 옆으로 칩니다. 마지막 쇠구슬이 튕겨 나갑니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쇠구슬들은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사람들의 뇌를 통과하여 전달됩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각이 얼마나 많은 대중과 세대를 사로잡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귀한 진리가 살아 있고 행동하며 우리를 다스리고 계몽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힘이나 찬란한 빛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지나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5서한〉중에서
4.
인간의 마음에는 신이 무(無)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친히 심어 놓으신 진리 외에는 다른 어떤 진리도 없다는 근본적인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대중의 역사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그 시대적 흐름을 바라볼 수는 없게 됩니다. 섭리나 완벽하게 현명한 지성만이 사건의 흐름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존재인 인간의 이성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성에서는 본래 결코 나올 수 없는 자극을 받아야 했고, 그 최초의 관념과 최초의 지식은 단지 최고 이성의 기적적인 전해 줌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 봅시다. 그러면 인간 이성의 진보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이성을 구성했던 힘은 인간의 이성에 처음으로 움직임을 부여했던 순간에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어야 함이 지당하겠지요.
-〈제6서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