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해석의 주체를 다시 묻다
AI는 더 이상 자료를 정리하는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요약하고 분류하며 의미를 제안하는 존재로 연구 과정에 개입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질적 연구 방법을 근본부터 다시 묻는다. 인쇄술이 측정을 가능하게 하고, 사진이 관찰을 확장하며, 인터넷이 패턴을 가시화했다면, AI는 해석의 과정 자체를 외재화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인간-AI 협업을 병렬 분석, 삼각 검증, 보조와 확장, 공동 해석과 생성 등으로 유형화하고, 각 방식이 어떤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핵심은 ‘얼마나 AI를 사용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 방식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해석, 맥락, 책임이라는 질적 연구의 인식론을 토대로 연구 방법 서술의 원칙과 윤리적 기준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제안한다. AI를 둘러싼 찬반을 넘어, 해석의 최종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질적 연구의 새로운 공통 언어를 제시하는 책이다.
200자평
생성형 AI는 질적 연구의 해석 과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인간-AI 협업의 유형과 연구 방법 서술 원칙을 체계화하며, 해석의 책임과 연구 윤리를 다시 세운다. AI 활용 여부가 아니라 그 선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묻는 방법론 안내서다. AI문고. aiseries.oopy.io에서 필요한 인공지능 지식을 찾을 수 있다.
지은이
김영순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와 대학원 다문화교육학과 교수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문화변동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하대학교 부설 다문화융합연구소 소장, 다문화멘토링사업단 단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학문 후속 세대를 위해 전국의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 방법론 캠프와 질적 연구자 수련 과정인 ‘큐알슐레’의 교장을 맡고 있다. 질적 연구 방법론에 관한 주요 저서로는 《질적 연구의 즐거움》(2018), 《문화기술지와 질적 연구의 이해》(2022), 《이야기의 사회과학: 생애사와 내러티브 연구》(2023), 《공존의 사회학》(2024), 《질적 연구자-되기와 자문화기술지》(2025), 《공존의 별자리: 다문화사회의 시민윤리》(2025) 등이 있다.
차례
AI 시대, 질적 연구 방법의 재구성
01 질적 연구에서 연구자의 위치성
02 질적 연구자의 책임과 역할
03 코딩, 범주화, 해석과 AI의 만남
04 질적 연구에서 AI의 취약성
05 질적 연구에서 AI의 위치성
06 인간-AI 협업의 인식론적 전환
07 인간-AI 협업 유형 I: 병렬 분석과 삼각 검증 모델
08 인간-AI 협업 유형 II: 보조·확장 모델
09 인간-AI 협업 유형 III: 공동 해석·생성 모델
10 연구 목적별 인간-AI 협업 전략
책속으로
주목할 점은 에믹과 에틱이 대립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질적 연구의 해석은 언제나 이 두 관점 사이의 긴장과 교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에믹 관점에만 머물 때 연구는 참여자의 경험을 존중하는 서술에 그칠 위험이 있다. 한편 에틱 관점이 과도해질 경우 연구자는 자신의 이론적 언어를 참여자의 삶 위에 덧씌우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질적 연구자는 어느 한 관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떤 분석 단계에서, 어떤 관점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연구자의 위치성은 다시 한번 중요해진다. 연구자가 어떤 이론을 선택하고, 어떤 사회 문제에 민감한지는 에틱 관점의 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연구자가 연구 참여자와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있는지, 어떤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지는 에믹 관점의 깊이와 방향을 좌우한다.
-01_“질적 연구에서 연구자의 위치성” 중에서
생성형 AI는 바로 이 해석의 영역에서 질적 연구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AI는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이론적 개념을 연결하고, 연구 결과를 논의하는 정교한 해석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문장이 인간 연구자가 작성한 것보다 더 매끄럽고 설득력 있게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AI는 ‘학습 주체성’, ‘기술 권력’, ‘정동의 재구성’과 같은 개념을 연결하여, 연구 결과를 비판적 담론의 언어로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AI는 자신이 생성한 해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AI는 왜 특정 해석을 선택했는지, 다른 해석 가능성을 왜 배제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선택에 따른 윤리적, 학문적 결과의 책임을 감당하지도 않는다.
-03_“코딩, 범주화, 해석과 AI의 만남” 중에서
이러한 전환은 질적 연구의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질적 연구에 더 높은 수준의 방법론적 성숙을 요구한다. 연구자는 더 이상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는 진술만으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할 수 없다. 예컨대 결혼 이주 여성의 인터뷰에서 “참고 산다”는 발화를 분석할 때, 연구자는 단일한 해석을 제시하는 대신, AI가 제안한 ‘적응 전략’, ‘정서 억제’, ‘구조적 제약의 내면화’와 같은 여러 해석 가능성 중에서 왜 특정 해석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다른 해석들은 왜 배제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 설명 과정 자체가 분석의 일부가 된다. 인간-AI 협업 논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오해는 협업이 곧 책임의 분산을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AI가 분석에 참여했다고 해서 해석의 책임이 인간 연구자와 AI 사이에 나뉘는 것은 아니다.
-06_“인간-AI 협업의 인식론적 전환” 중에서
공동 해석·생성 모델은 일반적으로 순환적 대화 구조를 따른다. 연구자는 자료와 이론을 바탕으로 질문을 구성하고, AI는 이에 대해 요약, 재구성, 개념화, 대안적 설명을 제시한다. 연구자는 이 산출을 검토·수정하며 새로운 질문을 생성하고 다시 AI와 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질문의 주도권이다. 질문을 누가 설정하는가에 따라 협업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공동 해석·생성 모델이 방법론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질문의 설정과 전환이 인간 연구자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질문의 주도권이 AI로 넘어가는 순간, 연구자는 해석의 주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직면한다.
-09_“인간-AI 협업 유형 III: 공동 해석·생성 모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