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니컬러스 빌런의 3부작 희곡집 《폴트 라인》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 작품은 캐나다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캐나다 총독 문학상’을 수상하며 빌런의 작가적 역량을 세계적으로 증명했다.
‘폴트 라인(Fault Line)’은 지질학 용어로 ‘단층선’을 의미한다. 작가는 지각의 어긋남을 뜻하는 이 단어를 통해 인간관계, 사회, 개인의 윤리 의식 속에 잠재된 균열과 결함(fault)을 날카롭게 은유한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세 편의 작품이 실렸으며, 북대서양의 거대 지각 구조를 이루는 섬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세 작품은 여러 개의 섬처럼 흩어진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균열을 만들고, 그 속의 고립과 단절뿐 아니라 또 다른 섬들과의 연대를 위해 손을 내미는 인간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린란드〉, 가족이라는 이름의 고립과 단절
2009년 서머웍스 시어터 페스티벌 최우수 프로덕션상 수상작으로,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며 지도에 없던 새로운 섬이 발견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빙하학자 ‘조너선’과 그의 아내 ‘주디스’, 조카 ‘타냐’ 세 인물의 독백이 차례로 이어진다. 빙하가 후퇴하며 섬이 드러나듯 인물들의 내면에 감춰졌던 상실의 고통과 분노가 서서히 드러난다. 세 사람의 파편화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면 가족을 갈라놓은 비극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아이슬란드〉, 금융 위기가 불러온 비극
2012년 서머웍스 신작 부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으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배경으로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된 인간의 욕망과 비뚤어진 자기합리화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에스토니아 유학생 ‘카산드라’, 돈을 숭배하는 부동산업자 ‘하림’, 의문의 여인 ‘안나’가 한 아파트에서 만나 기묘하게 얽힌다. 하림의 냉소적인 자본 논리와 카산드라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 안나의 예측 불허한 행동은 심리 스릴러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인물들의 욕망과 이기심이 화산처럼 분출되는 과정을 통해 무너진 경제 시스템과 함께 붕괴한 인간의 도덕적 균열을 서늘하게 포착한다.
〈페로 제도〉, 행동주의의 위선과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
2013년 루바브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환경 단체 ‘고래 액션 허브’의 활동가 ‘다라’가 청중 앞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극은 다라가 고래 보호 활동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들려주며, 함께 변화를 꿈꾸던 동료 ‘레이철’과의 일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페로 제도의 전통적인 고래 사냥 방식인 ‘그린다드랍’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자기 합리화의 씁쓸한 민낯을 고발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를 확장한다. 이상주의와 현실의 대립, 전통과 환경 운동의 갈등,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 문화와 윤리의 충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다층적인 현대 사회의 민낯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며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1인 독백 형식은 연극만의 독특한 사유의 공간을 마련한다. 《폴트 라인》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개인의 심리적 심연을 지질학적 메타포로 연결하며,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의 위태로운 균열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200자평
니컬러스 빌런의 3부작 희곡집 《폴트 라인》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 작품은 캐나다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캐나다 총독 문학상’을 수상하며 빌런의 작가적 역량을 세계적으로 증명했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세 편의 작품이 실렸으며, 북대서양의 거대 지각 구조를 이루는 섬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지표 아래 쌓인 압력이 지진이나 화산 폭발로 이어지듯, 작품 속 인물들이 품은 모순과 고통은 독백 형식을 빌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세 작품은 여러 개의 섬처럼 흩어진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균열을 만들고, 그 속의 고립과 단절뿐 아니라 또 다른 섬들과의 연대를 위해 손을 내미는 인간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은이
니컬러스 빌런
니컬러스 빌런(Nicolas Billon, 1978~)
니컬러스 빌런은 캐나다 극작가로, 1978년 온타리오주 오타와에서 태어나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성장했다. 2013년 〈그린란드〉(2009)와 〈아이슬란드〉(2012), 〈페로 제도〉(2012)를 3부작으로 엮은 희곡집 《폴트 라인》으로 캐나다 최고 문학상인 총독상을 수상했다.
빌런의 작품들은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틈을 파고들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와 관계의 핵심에 놓여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2014년 초연된 〈도살자〉에서 정의와 관련된 질문을 정치 스릴러극의 형식으로 펼쳐 냄과 동시에 연극을 위한 허구적 언어를 도입하는 시도를 했다.
최근 10년 넘게 숨겨 온 이웃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의 민낯을 파헤친 스릴러 신작 〈더 네이버스(The Neighbours)〉를 북미 초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 외 작품으로는 〈사랑의 척도(The Measure of Love)〉(2005), 〈세이프 워드(The Safe Word)〉(2011), 〈도살자(Butcher)〉(2014)가 있으며, 6편의 각색 작품과 오페라 리브레토, 단막극 등이 있다. 각색 작품 가운데 두드러지는 작품으로는 토론토 프린지 페스티벌 히트작이었던 〈시칠리아 사람(The Sicilian)〉(2009)과 〈세 자매(Three Sisters)〉(2014), 〈아가멤논(Agamemnon)〉(2016), 캐나다 스트랫퍼드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보물섬(Treasure Island)〉(2017)이 있다.
옮긴이
주하영
주하영
주하영[필명 앨리스(Alice)]은 영문학자로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객원교수,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국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의 ‘합리적 극장’에 구현된 ‘상상력’의 정치학〉에 대한 연구로 2017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면서 현재까지 언론 매체 《인터뷰 365》에 다수의 비평 칼럼을 꾸준히 게재하고 있다.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을 거쳤으며, 현재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정회원이다. 월간 《한국연극》, 월간 《국립극장》, 월간웹진 〈오늘의 서울연극(TTIS)〉,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다수의 매체에 평론을 기고하고 있으며, 2024년 11월 미국 극작가 마틴 셔먼의 희곡 〈로즈〉를 판소리로 각색한 〈로즈 이야기〉의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다. 주로 영미권 원작 및 해외 작품의 한국 수용에 관심이 많으며, 관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평론을 추구한다. 저서로는 2020년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Vol. 1》과 2021년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Vol. 2》, 2023년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Vol. 3》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피지컬 씨어터의 새로운 융합 가능성: ‘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2022), 〈키이란 헐리의 〈마우스피스〉−메타드라마의 정치성 구현과 ‘해방된 관객’〉(2022), 〈‘사회적 광기’에 휩싸인 ‘극단적 무지의 자아’: 에드워드 본드의 〈리어〉를 중심으로〉(2019), 〈‘사소한 오브제’가 구현한 인간 현실의 ‘현장’: 〈균형 잡기〉의 드라마투르기 분석을 중심으로’〉(2018) 등이 있다.
차례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조너선 : 얼음도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걸 알아내는 일이 제가 하는 일이죠. 얼음이 자신의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 과거에 무엇을 겪었는지,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는지, 지금 얼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을 밝혀내는 일이랄까요? 얼음도 우리처럼 자신들의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음이라는 빙하를 통해 우리의 과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죠.
_〈그린란드〉, 22쪽
타냐 : 이따금 사람들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일을 할 때가 있어요. 토머스 모리시 섬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경우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토머스를 몰라요. 그가 어떤 애인지 모르죠. 그래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말하면, 그때 여러분이 연상할 수 있고, 또 연결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토머스 모리시? 어, 그래, 그린란드 해안가에 지구 온난화 때문에 떠오른 섬, 그 섬 이름이지 않아? 정말 끔찍한 재난이야!’일 뿐이죠.
_〈그린란드〉, 57쪽
진보주의자들은 이런 얘기 듣는 거 존나 싫어해. 하지만 진실은, 그들도 주식 시장이 폭락하는 걸 똑같이 두려워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그들도 투자했으니까. 윤리적 펀드라든가, 물론 부동산에도. 어쨌든 결국 그들도 같은 걸 원하고 있어. 이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거. 그게 바로 자본주의란 겁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_〈아이슬란드〉, 93쪽
안나 : 난 기다렸어요. 그에게 수치심이 솟아오르길 기다렸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그의 뺨에서 어떤 붉어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죠.
_〈아이슬란드〉,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