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8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조선 선비의 두 번의 여행, 그 내밀한 기록
서강대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유일본으로 잠들어 있던 19세기 한글 필사본 일기, 《금강 일기 부 서유록》이 현대의 독자들과 만난다. 이 책은 월와(月窩)라는 호를 가진 한 선비가 1841년과 184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동쪽 끝 금강산과 서쪽 끝 의주를 여행하며 남긴 생생한 기록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책의 전반부인 〈금강 일기〉는 1841년 늦봄, 저자가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쓴 풍류의 기록이다.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 외금강, 총석정에 이르는 여정 속에서 마주한 기암괴석과 폭포, 사찰의 아름다움을 시와 산문으로 유려하게 담아냈다. 화창한 날씨 속에서 느낀 설렘과 자연에 대한 찬탄, 동행한 지인들과 나눈 시심(詩心)이 가득해 읽는 이로 하여금 금강산의 절경 속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후반부인 〈서유록〉은 5년 뒤인 1846년 겨울, 의주부윤으로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떠난 고단한 여정의 기록이다. 혹독한 추위를 뚫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 너머 청나라 봉성까지 다녀온 이 여행기에는 풍광보다는 사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낯선 서북 지방의 풍속, 국경 지대의 긴장감,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정과 세태를 꼼꼼하게 기록해 19세기 조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증언하는 미시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의 추억을 정리하기 위해 쓴 수고본(手稿本)이기에 더욱 솔직하고 담백하다. 봄날의 화려한 금강산 유람과 겨울날의 척박한 관서행이라는 대조적인 두 여행을 통해, 독자들은 180년 전 조선의 산천과 그 속에서 숨 쉬던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느림과 여유,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이 고전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200자평
교통도 숙박도 불편하기 그지없던 시대, 한 선비가 특별한 두 차례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을 날마다 꼼꼼히 기록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때로는 산문으로, 때로는 시로 남겼다. 바로 1841년 봄 금강산의 절경과 풍류를 노래한 〈금강 일기〉와 5년 뒤 겨울, 의주와 국경을 넘나들며 서북 지방의 삶과 세태를 기록한 〈서유록〉이다. 화려한 풍광과 고단한 겨울 여정의 대비 속에 조선 후기의 산천과 풍속, 사람 냄새가 생생하다. 보여 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더욱 솔직한 이 기록은 180년 전 조선의 일상을 마주하게 하는 귀중한 미시사적 고전이다.
지은이
강일영
강일영(姜鎰永, 1796~?)은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월와(月窩)다. 오랫동안 이 책의 저자는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역자가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강일영임을 밝혔다. 저자가 책 속에 남긴 단서인 1796년생이라는 나이, 진주 강씨, 아들이 넷이라는 점, 과거 급제 이력, 그리고 양주(남양주) 월산에 거주했다는 사실 등을 토대로 과거 급제자 명단을 정밀 분석한 결과다.
강일영은 순조 28년(1828) 3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1등 4위로 급제했다. 벼슬길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강호에 묻혀 지내며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보이며, 헌종 3년(1837)과 철종 12년(1861)에 각각 급제한 아들 의철(義喆)과 의팔(義八)의 기록을 통해 1861년까지 생존하며 다복한 삶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는 저자가 강희영(姜羲永)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거주지와 가족 관계 등의 정황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이번 신간을 통해 저자의 이름을 강일영으로 바로잡고, 19세기 중반 금강산과 관서 지방을 여행하며 남긴 그의 생생한 기록을 온전한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옮긴이
조용호
조용호는 1963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출생 신고도 1년 가까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용인군 강원도라 부를 정도의 깡촌에서 태어난 관계로, 한국 나이로 아홉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태어난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1983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낯선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에 SK 산하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 연수 장학생 8기로 선발되어, 3년간 사서삼경을 위주로 한문 공부를 했다. 이 일은 이후의 삶의 향방을 크게 결정하게 된다.
고전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처음에는 고전 시가를 공부해 향가를 해독해 보겠다는 야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2학년 때 이재선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던 ‘현대소설론’ 시간에 ‘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조씨 삼대록》이라는 40권짜리 소설이 있는데 국내 유일본이고 가치가 크지만 아무도 읽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요지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나밖에 없겠구나’라는 약간의 의무감과 건방진(?) 생각으로 그 소설 읽기에 도전했다. 약 1년간 고서실에서 책을 빌려서 읽고 정리해 학부 졸업 논문으로 제출했는데, 그것으로 끝내 버리기는 너무나 아까워 좀 더 깊이 분석하고 체계화해서 석사 학위 논문으로 냈다.
이때쯤 전북대에 계시던 선배인 이종주 선생께 ‘네가 교수가 되고 싶으면 고전 시가로 논문을 쓰는 것이 좋다. 고전 소설을 전공하는 교수들의 연배는 이미 한창때지만, 고전 시가 전공 교수들은 조만간 줄줄이 퇴임을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기차역을 떠난 기차와 같은 상태이고 온전히 정리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아서 어쩔 수 없이 삼대록 소설 읽기를 계속했다. 그 결과로 《유씨 삼대록》·《임씨 삼대록》·《조씨 삼대록》을 분석해, 〈삼대록 소설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과정을 수료한 1993년부터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하게 되었으며, 한남대학교·청주대학교·서강대학교·중문의과대학교(현 차의과학대학교)에서 도합 9년 반 동안 강의를 했다. 시간 강사를 하는 동안에는 주로 글쓰기와 읽기 과목을 담당했는데, 이 경험을 통해 읽기와 쓰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직도 대학 교수는 개인적인 연구보다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며, 개인의 내면적 성장과 온전한 인간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전공보다 교양을 더 중시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2002년 9월에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전임으로 임용되어 처음으로 붙박이로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국문과에는 고전 문학 전공자가 혼자만 있어서(구비 문학 및 민속학 전공자는 따로 있음), 고전 산문·고전 운문·한문학 과목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부담이 되거나 거북하지 않고 성향에 더 맞으며 자유스럽다고 느낀다. 이는 한곳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고전 시가에 관심이 많았고, 한문을 공부했으며, 고전 산문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말하자면 목포대학교는 옮긴이에게 ‘득기소재(得其所哉, 딱 알맞은 자리를 얻었구나!)’의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인 셈이다.
대학에서는 교양과정부장과 기초교양교육원장을 역임하면서 교양 교육을 위한 교육 과정의 개발에 노력했으며, 교양과정부에 교양 교육을 전담하는 교수를 둘 수 있도록 관심을 환기해 철학과 심리학 전공 교수를 뽑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교수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대외적으로는 국립 대학의 위상 제고와 교수들의 권익 향상에 노력했고, 대내적으로는 평교수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학교의 행정이 원활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견제 기능을 했으며, 총장추천위원장으로서 총장 선거를 중립적이고도 엄정하게 관리했다.
그동안 《삼대록 소설 연구》 외에 단독 및 공저서를 여러 권 냈고, 《19세기 선비의 의주·금강산 기행》·《여영웅》 등의 번역서를 출간했으며, 소설·시가·한문학 등 고전 문학 영역 전반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썼다. 현재는 지만지한국문학과 손잡고 현대 소설을 전공한 아내 최현주 박사와 함께 신소설 가운데 이해조의 작품 10여 편에 대한 주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차례
금강 일기(金岡日記)
병서 부 시구(幷序附詩句)
신축년(辛丑年) 윤3월 23일 정축일(丁丑日) [1841. 5. 13]윤3월 24일 무인일(戊寅日) [5. 14]
윤3월 25일 기묘일(己卯日) [5. 15]
윤3월 26일 경진일(庚辰日) [5. 16]
윤3월 27일 신사일(辛巳日) [5. 17]
윤3월 28일 임오일(壬午日) [5. 18]
윤3월 29일 계미일(癸未日) [5. 19
윤3월 30일 갑신일(甲申日) [5. 20]
4월 1일 을유일(乙酉日) [5. 21]
4월 2일 병술일(丙戌日) [5. 22]
4월 3일 정해일(丁亥日) [5. 23]
4월 4일 무자일(戊子日) [5. 24]
4월 5일 기축일(己丑日) [5. 25]
4월 6일 경인일(庚寅日) [5. 26]
4월 7일 신묘일(辛卯日) [5. 27]
4월 8일 임진일(壬辰日) [5. 28]
4월 9일 계사일(癸巳日) [5. 29]
4월 10일 갑오일(甲午日) [5. 30]
4월 11일 을미일(乙未日) [5. 31]
4월 12일 병신일(丙申日) [6. 1]
4월 13일 정유일(丁酉日) [6. 2]
4월 14일 무진일(戊辰日) [6. 3]
4월 15일 기해일(己亥日) [6. 4]
4월 16일 경자일(庚子日) [6. 5]
4월 17일 신축일(辛丑日) [6. 6]
4월 18일 무인일(戊寅日) [6. 7]
4월 19일 기묘일(己卯日) [6. 8]
4월 20일 경진일(庚辰日) [6. 9]
4월 21일 신사일(辛巳日) [6. 10]
4월 22일 임오일(壬午日) [6. 11]
서유록(西遊錄)
서유록 병서
병오년(丙午年) 9월 29일 신해일(辛亥日) [11. 17]
9월 30일 임자일(壬子日) [11. 18]
10월 1일 계축일(癸丑日) [11. 19]
10월 2일 갑인일(甲寅日) [11. 20]
10월 3일 을묘일(乙卯日) [11. 21]
10월 4일 병진일(丙辰日) [11. 22]
10월 5일 정사일(丁巳日) [11. 23]
10월 6일 무오일(戊午日) [11. 24]
10월 7일 기미일(己未日) [11. 25]
10월 8일 경신일(庚申日) [11. 26]
10월 9일 신유일(辛酉日) [11. 27]
10월 10일 임술일(壬戌日) [11. 28]
10월 11일 계해일(癸亥日) [11. 29]
10월 12일 갑자일(甲子日) [11. 30]
10월 13일 을축일(乙丑日) [12. 1]
10월 14일 병인일(丙寅日) [12. 2]
10월 15일 정묘일(丁卯日) [12. 3]
10월 16일 무진일(戊辰日) [12. 4]
10월 17일 기사일(己巳日) [12. 5]
10월 18일 경오일(庚午日) [12. 6]
10월 19일 신미일(辛未日) [12. 7]
10월 20일 임신일(壬申日) [12. 28]
10월 21일 계유일(癸酉日) [12. 9]
10월 22일 갑술일(甲戌日) [12. 10]
10월 23일 을해일(乙亥日) [12. 11]
10월 24일 병자일(丙子日) [12. 12]
10월 25일 정축일(丁丑日) [12. 13]
10월 26일 무인일(戊寅日) [12. 14]
10월 27일 기묘일(己卯日) [12. 15]
10월 28일 경진일(庚辰日) [12. 16]
11월 1일 신사일(辛巳日) [12. 17]
11월 2일 임오일(壬午日) [12. 18]
11월 3일 계미일(癸未日) [12. 19]
11월 4일 갑신일(甲申日) [12. 20]
11월 5일 을유일(乙酉日) [12. 21]
11월 6일 병술일(丙戌日) [12. 22]
11월 7일 정해일(丁亥日) [12. 23]
11월 8일 무자일(戊子日) [12. 24]
11월 9일 기축일(己丑日) [12. 25]
원문
金岡日記
西遊錄
해설
옮긴이 후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성년이 되면서부터 금강산의 절경에 대해서는 배가 부를 만큼 들어 와, 매번 흔쾌하게 유람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왔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마음만 애태웠을 뿐, 세월이 흘러도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할까 저어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자(字)가 일초(一初)이고 호(號)가 미산(米山)인 석사(碩士) 안종하(安鍾夏)와 자가 천서(天叙)이고 호가 창서(滄西)인 상사(上舍) 이천범(李天範)이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이들은 내게는 참으로 백아(伯牙)의 거문고요, 환이(桓伊)의 피리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기꺼이 일어나 함께 가기로 뜻을 정하니, 마치 평생의 소원을 이룬 듯 득의에 차는 것이었다.
길의 거리를 헤아리자면 석 달은 양식을 모아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가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서라도 용감하게 나아가 단숨에 비로봉(毗盧峯) 정상에 올라 휘이익 휘파람 소리라도 낸다면, 어찌 고요한 산수에서 즐길 만한 훌륭한 일이 아니랴?
이에 그 일에 대해 서문을 달고 아울러 그 지난 곳의 전말을 기록한다.
〈금강 일기〉 〈병서 부 시구(幷序附詩句)〉에서
점점 올라가서 오선암(五仙嵒)을 차례로 보고 금강문(金剛門)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문’이라고 하는 것은 바윗돌 사이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뚫려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또 옥류동(玉流洞)·비봉폭(飛鳳瀑)·창옥담(蒼玉潭)·무봉폭(舞鳳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비봉 폭포가 구룡연에서 가장 꼭대기에서 하늘로 열려 통하고 있었다. 봉우리들은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데, 왕왕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생긴 것도 있어, 참으로 이른바 ‘조각조각이 모두 금(片片金)’이라고 할 만했다.
용연(龍淵)은 긴 폭포인데,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높이가 10길은 되었고 돌에 팬 웅덩이의 둘레는 50보가 넘을 듯했으며, 물빛은 새파래서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네 벽에는 폭포수가 흩뿌려져서 비록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마치 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돌은 미끄러워서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런 줄 모르고 가까이 다가가 보려 했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겨우 일어나 안전한 곳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이 일이 비록 이미 지나간 것이긴 하지만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일에 한번 연못으로 떨어졌다면 비록 수백 명이 있더라도 갑자기 건져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뒷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조심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금강 일기〉 〈4월 9일 계사일(癸巳日) [5. 29]〉에서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어제 내린 비로 개울물이 사납게 넘쳐 흘러내렸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추지령(楸池嶺)에 도착하니 30리 길이었다. 또 10리쯤 더 가서 화천 주막(華泉店)에 이르렀는데, 마침 어떤 포수가 노루를 잡았다기에 다리 한 짝을 사서 삶아 익혀 술안주를 했더니 맛이 정말 좋았다. 또 30리쯤 가서 가회 주막(加回店)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여기에서 또 40리를 걸어 대오목 주막(大五目店)에 이르러 쉬면서 묵었다.
아마도 여러 날 산행을 해서 그런지 다릿심이 꽤 강해져서 하루에 100리 이상을 걸어도 그다지 고달픈 줄 모르겠다.
〈금강 일기〉 〈4월 17일 신축일(辛丑日) [6. 6]〉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100년 동안에 당대에 뜻을 이뤄 높은 벼슬에 올라 백관을 다스리고 대소사를 통솔하는 것은 진실로 남자가 가장 해 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천명에 달린 일이며,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자연을 누리는 즐거움에 마음을 붙여서, 누대(樓臺)의 뛰어난 경치를 좇아 구경하며 이름난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그다음으로 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나는 관서 지방이 우리 동방의 명승지이고 특히 유경(柳京)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물리도록 들어 왔지만, 아직 실제로 가 보지는 못했다. 매양 결행하고자 해도 천 리나 되는 먼 길이므로, 하루치 세끼의 식량만을 챙겨서 떠날 길이 아니라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단신으로 대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몸만 앞세워 나설 수도 없었다. 그래서 늘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그 숙원을 펼쳐 보지 못할까 저어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윤 공(尹公) 금범(錦帆)이 용만(龍彎)의 수령이 되자, 관에서 마련한 인마를 갖추어 내게 보낼 테니 여행 삼아서 한 열흘간 유람을 하라고 초청했다. 이에 드디어 일어나 길을 나서니, 이때는 병오년(丙午年) 9월 29일 신해일(辛亥日)[1846. 11. 17]이었다. 이날로부터 11월 9일[1846. 12. 26]까지 석 달 동안, 실제로는 40일이 넘지 않는 기간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의 경과와 전말에 대해, 비록 장황하게 과장하지 않더라도 날마다 기록했으니, 거의 달리는 말을 타고 산천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동안 지은 약간의 시구에 이르러서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했으니 보는 이들은 시 품격의 고하를 따져서 꾸짖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작은 다행이랴!
〈서유록〉 〈서유록 병서〉에서
찬 기운이 어제보다 더 심해졌다. 추위에 생기가 막히니 한겨울이 가까이 온 모양이다. 말 위의 행색은 온몸이 얼어 굽히고 펼 수조차 없으니, 《시경》에서 이른바 ‘너무나도 힘들어 숨이 막힌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라 하겠다.
나의 이번 여행길은 생각지도 않던 차에 별안간 나선 것이라, 의복도 본디 얇은 데다가 털 달린 장구들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천 리나 되는 변방의 바람을 뚫고 온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도 믿지 못하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기를 무릅쓰고 곧장 달려가 겨우 봉산(鳳山)의 합룡 주막(合龍店)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바람이 크게 불었는데, 얼굴은 칼로 베는 듯했고 옷은 물을 뿌려 댄 것처럼 뻣뻣했다.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채로 겨우 동선령(洞仙嶺)을 넘어 사인암 주막(舍人巖店)에 이르러 묵었다. 날이 저물어 사인암은 보지 못했다.
〈서유록〉 〈10월 4일 병진일(丙辰日) [11. 22]〉에서
석산(石山)에 이르니 몇 간짜리 초막이 있어서 말에서 내려 다리를 좀 쉬었다. 출발할 때 관세청(官稅廳)에서 요깃거리를 가져온 것이 있어서, 여기서 자루를 풀어 밥을 먹었다. 마침 지나가는 의주 상인을 만나서 붙잡고 말을 걸었는데, 그들이 청나라 술을 몇 잔 마시라고 권해 너무 취했다.
조금 있다가 청나라 사람 둘이 차례로 와서, 그들과 한자리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행장을 보고서 조심하는 태도도 없이 다짜고짜 통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통사가 조선의 태학사(太學士) 어른이라고 답하니, 저들은 경탄하면서 서로를 보고 ‘귀인이구나’라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떡 두 덩이를 바치기에, 하인을 불러서 자루 속에 넣어 두라고 했다. 나중에 집안사람들에게 보여 줄 심산이었다.
〈서유록〉 〈10월 16일 무진일(戊辰日) [12. 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