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자이 오사무와 꽃
다자이의 젊은 시절 작품에는 ‘하강 지향’, ‘불안’, ‘회한’, ‘고뇌’의 그림자가 만년을 연상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 많다. 그는 특히 ‘꽃’의 상징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자연스럽게 표출했다. 이에, 다자이 오사무의 첫 번째 작품집 《만년》(1936)에서도 특히 ‘꽃’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네 작품을 선역했다.
첫 수록작〈잎〉은 《만년》에 실린 첫 번째 단편이다. 이 작품에서 다자이는 ‘생’과 ‘사’의 의미를 꽃과 잎을 통해 드러낸다. 작품은 “죽으려고 생각했다”로 시작하여 생을 생각하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꽃’은 ‘톡 하고 터져 지저분한 즙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손가락을 썩게 한다’는 청춘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한편 ‘잎’은 ‘앞’과 ‘뒤’ 그리고 ‘푸르다’와 ‘바싹바싹 말라 벌레 먹은 것’이라는 상반된 어휘로써 인간의 고뇌의 삶을 의미한다. 조각조각 흩날리는 언어 표현이 자살, 죽음, 불안, 허무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청춘의 문학에서 만년을 생각하는 다자이 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았다.
두 번째,〈추억〉은 다자이의 어린 시절을 자전적으로 담은 단편이다. 주인공은 부모에 대한 기억보다 이모와 하인들과 성장하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술회한다. 가족에게 소외된 외로움, 자신감 결여 등으로 학업보다는 복장이나 용모에 신경을 쓰면서 타인을 의식하던 중 ‘미요’를 통해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한다. 고향과 첫사랑에 대한 추억의 매개물로 황매화, 장미, 국화, 달맞이꽃 등 아홉여 종의 꽃이 묘사된다.
세 번째,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는 다자이의 작품 중에서도 한 가지 종류의 꽃, 백일홍을 일곱 차례나 수개월에 걸쳐 그 변화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백수 청년 집주인과 백수 청년 세입자, 그리고 그의 아내의 변화 과정이 백일홍과 함께 묘사된다. 미묘한 관계 속에 집세를 받지 못하면서도 세입자에게 끌리는 집주인과 백수임에도 여기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세입자는 점점 닮은꼴이 된다. 이들의 생활상은 근대인의 무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또한 근대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거부할 수 없는 다자이를 연상하게 한다.
네 번째, 〈장님 이야기〉의 제목은 《마쿠라노소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것을 '메쿠라소시(장님 이야기)'로 표현할 정도로 삶에 대한 무게를 강하게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은 협죽도에 끌려 이웃집 여인에게 한 그루를 얻게 된다. 협죽도는 대개 기후가 따뜻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주인공이 살고 있는 아오모리에서는 보기 힘든 꽃이다. 붉은빛이 감돌아 무척 아름답지만, 잎과 줄기에 독성을 가지고 있어, 꽃말 역시 ‘주의’다. 유독 이 꽃에 관심을 보이는 주인공은 소설 첫 부분의 “아무것도 쓰지 마. 아무것도 읽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오직 살아만 있어”라는 글귀처럼 꽃을 매개로 극에 달하는 슬픈 심정 변화를 드러낸다. 소설 말미 주인공은 일본 자생종과 대비되며 인공의 극치를 보이는 서양화단을 응시하며 ‘눈물’을 보인다. 이들 꽃을 열거한 뒤에 붙인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한마디야말로 작가의 심경 묘사 그대로다.
소설을 읽은 후, 소설과 꽃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할 수 있도록 다자이 오사무 전문가인 역자 하정민의 논문 〈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과 ‘꽃’의 상징에 대한 연구〉(2016, 대한일어일문학회)를 발췌해 곁텍스트로 실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남긴 사진과 글씨, 그림들
이 책에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 입체적으로 닿게 할 이미지 자료도 다수 실렸다. 가족은 언제나 그의 작품의 주요 소재였다. 이들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본가 쓰시마가의 가족사진부터 어머니, 이모와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유모 다네의 사진을 실었다. 이 외에 〈추억〉 속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고교 시절 교복 차림 사진과 자필 영어 작문, 교과서에 남긴 낙서를 수록했다. 여기에 더해, 작가가 직접 남긴 서예 작품과 그림도 여러 점 실었다. 〈잎〉의 한 구절을 쓴 서예 작품도 있어 눈길을 끈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자료들이다.
200자평
다자이 오사무의 전기 작품 중에서도 ‘꽃’의 상징을 통해 무의식 세계를 자연스럽게 표출한 네 작품 〈잎〉, 〈추억〉,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 〈장님 이야기〉를 선역했다.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 다자이 오사무 전문가인 역자 하정민의 논문〈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과 ‘꽃’의 상징에 대한 연구〉를 발췌해 곁텍스트로 실었으며, 작가의 작품 세계에 입체적으로 닿을 수 있도록 다자이 오사무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을 비롯해 고교 시절 자필 낙서, 성인이 된 후 남긴 서예, 그림 등의 이미지 자료를 여럿 실었다.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일본 아오모리현(青森県) 가나기(金木) 태생으로, 신흥 대지주 쓰시마가(津島家)의 7남 4녀 중 열째로 태어나 유모의 손에 자랐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다. 어머니가 병약한 탓에 육친의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해, 일생을 불안과 고뇌 속에서 방황했다.
아오모리중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사키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이즈미 교카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에 심취하지만, 아쿠타가와의 자살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1930년 도쿄제국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하면서 좌익 운동에 가담한다. 이후 게이샤 출신 하쓰요와의 연애로 인해 가족과 불화를 겪고 학교에서도 제적당한다. 하쓰요와 결혼하고도 한동안 좌익 활동을 계속했으나 1932년 좌익 단체에서 탈퇴하면서부터 배반자라는 죄의식을 느끼며 문학에 매진한다.
다자이는 1936년 첫 번째 창작집 《만년》으로 문단에 등장한다. 특히 자학적이고 파멸적인 분위기로 인간의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한다. 하쓰요와 결별하고 수차례 약물 중독과 자살 시도를 거듭하던 그는 1939년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하면서부터 비교적 안정되어 〈여학생〉을 비롯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간다.
1947년 대표작인 《사양》을 발표하지만 1948년 6월 13일, 39세의 나이에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무사시노 다마가와 상수원(玉川上水)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 실격》, 미완성작 《굿바이》를 사후 출간한다.
다자이(太宰) 문학은 자의식 과잉과 굴절된 소외감을 참신하고 다채로운 수법으로 표현하는 한편, 익살과 불안으로 채색된 독자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만년(晩年)〉(1936), 〈여학생(女生徒)〉(1939),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1940), 〈쓰가루(津軽)〉(1944), 〈사양(斜陽)〉(1947), 〈인간 실격〉(1948) 등 현대인의 영혼을 울리는 수작을 남겼다.
옮긴이
하정민
하정민(河廷旼)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을 전공했으며, 〈다자이 오사무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대학에서 일본어 문학 및 문화 관련 강의를 했고, 현재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해외에서의 교육 및 활동으로, 2000년도부터 일본 와세다대학교의 일본어 전수 과정 교육을 통해 선진 교육 및 학습 방법론을 습득해 발전시켰으며, 2007년도부터는 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 S. A) 영어 과정을 통해서도 선진 외국어 교육 방법론을 기반으로 TA 활동을 하면서 테슬(TESL)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미국 대통령(Barack Obama) 자원 봉사상을 2회 수상했고, 2018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좋은 수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가해 한국외대 영자 신문 《The Argus》에 2019년 3월호의 인물(People)로 선정, 게재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문학 작품의 상징 연구에 관심이 많아 주요 논문으로 〈다자이 오사무 문학과 〈눈물〉〉(한국일어일문학회), 〈다자이 오사무 중기 작품에 나타난 복장 고찰〉(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前期文学)과 ‘꽃’의 상징에 대한 연구〉(대한일어일문학회) 등을 발표했고 그 외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에 나타난 ‘물’의 상징연구−《이즈의 춤추는 소녀》를 중심으로〉(일본어문학회)를 발표했다.
주요 역서로는 《문학, 일본의 문학》(제이앤씨, 2012), 《일본 명단편선 1》(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공역), 《일본 명단편선 4》(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 공역), 《다자이 오사무 중기 단편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20)이 있다.
차례
잎 葉
추억 思出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彼は昔の彼ならず
장님 이야기 めくら草紙
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과 ‘꽃’의 상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소녀의 니혼바시에서의 장사는 장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첫째 날에는 빨간 꽃이 한 송이 팔렸다. 손님은 무희였다. 무희는 피어나려는 붉은 꽃봉오리를 골랐다.
“피겠지?”
드세게 말했다.
소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핍니다.”
둘째 날에는 술 취한 젊은 신사가 한 송이 샀다. 이 손님은 취해 있는데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것이든 괜찮아.”
소녀는 어제 팔다 남은 꽃다발에서 하얀 봉오리를 꺼내어 건넸다. 신사는 훔치듯 슬그머니 받았다.
매상은 그뿐이었다. 사흘째, 바로 오늘이다. 차가운 안개 속에 오랫동안 계속 서 있었지만, 아무도 뒤돌아봐 주지 않았다.
(…)
소녀는 그 포장마차를 나와 전차 정류소로 가던 도중, 막 시들기 시작한 안 좋은 꽃을 세 명에게 건넨 것을 깊이 후회했다. 갑자기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로 격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일본어로 두 마디 했다.
꽃이 피기를. 꽃이 피기를.
−〈잎〉 중에서
2.
미요에 대한 기억도 점차 옅어졌다. 사실 한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게 왠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평소에 여자들 흉만 봐 왔던 터라, 동생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미요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렵, 유명한 러시아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한 여죄수의 경력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그 불행은 그녀 남편의 조카뻘 되는 귀족 대학생의 유혹에 넘어간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그 소설의 묘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둘이 라일락이 만발한 꽃 아래에서 첫 키스를 나누는 페이지에 마른 잎사귀 책갈피를 끼워 두었다. 멋진 소설을 남의 일인 것처럼 시치미 떼고 읽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 두 사람이 미요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추억〉 중에서
3.
정원에는 다섯 그루의 철쭉이 벌집처럼 피어 있었다. 홍매화 꽃은 지고 싱싱하고 푸른 잎이 보이며, 백일홍 가지 가지에 가냘픈 어린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덧문도 닫혀 있었다. 나는 가볍게 두세 번 문을 두드리며, 기노시타 씨, 기노시타 씨,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덧문 틈 사이로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몰래 엿보는 재미가 있나 보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거실에서 잠자고 있는 느낌이었다. (…) 설마 지금까지 자는 건 아니겠지 했다.
세이센의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현관문도 열려 있었다. 말을 건네자, 누구세요? 하는 세이센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아아, 들어오시지요.” 거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실내 공기가 왠지 음침했다. 현관에 선 채 거실 쪽을 들여다보니, 세이센은 잠옷 차림으로 이부자리를 급히 치우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전등불 아래에서 본 세이센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늙어 보였다.
(…)
“집세는 당분간 힘들겠습니다.”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이 도망갔습니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중에서
4.
나는 지금 잠을 자야 한다. 하지만 쓰기 시작한 창작을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
매일 밤 수많은 가지에 만발한 꽃과 같이 팔랑팔랑 나의 미간 주위로 날아드는 무수한 언어의 홍수가 오늘 밤은 또 어떻게 된 것인지, 눈이 완전히 그친 뒤의 하늘처럼 텅 비어 있어서 나 혼자 남겨져 차라리 돌이 되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으로 인해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손도 닿지 않는 먼 하늘을 날던 물빛나비를 잠자리채로 겨우 잡아 두 개 세 개, 그들의 덧없는 언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쨌든 잡았다.
밤의 언어.
−〈장님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