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논리경험주의 운동을 이끈 당대 저명 과학철학자 라이헨바흐가 당시의 물리학 지식이 가진 여러 세부적인 측면들을 상세하게 파악한 후, 물리적 지식의 철학적 의의를 분석적으로 규명했다.
책은 제1부와 제2부, 각각 열두 개의 절, 총 24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의 제목은 “물리적 지식의 일반 이론”이고, 제2부 “물리학의 개별 원리들 속 경험주의와 이론”이다. 제목과 같이, 제1부에서는 물리적 지식 일반과 관련된 여러 주제를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며, 제2부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주제 혹은 원리에 대한 상세한 철학적 분석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라이헨바흐가 당대의 물리학적 지식을 잘 이해하지 않고서, 당대의 물리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지 않은 채로 이와 같은 철학적 해명을 제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과학철학은 철학의 세부 분과로 분류되며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문화되어 있다. 개별 과학철학자도 서로 전공 분야가 다르면 상대의 논의를 깊이 이해하거나 검토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철학이 과학의 여러 철학적 측면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해도, 과학자와 과학철학자가 서로 밀접하게 협업하는 경우는 드물다. 라이헨바흐의 1929년 저작인 이 책,《물리적 지식의 목표와 방법》은 당시 철학자와 과학자가 지금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서로 협력했음을 보여 준다.
라이헨바흐는 대학 시절 플랑크, 보른, 힐베르트 등과 같은 물리학자와 수학자로부터 수학했다. 그의 학위 논문 또한 수학 및 물리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헌정된 그의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은 상대론에 대한 깊은 철학적 분석을 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통신회사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며 수학적 확률 이론과 상대론 및 양자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철학적 분석을 진행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1915년 이후부터 대략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정밀과학을 분석한 라이헨바흐는, 1920년대 후반 이른바 ‘정밀과학의 철학’에 관한 대가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 책을 낼 당시에는 아인슈타인, 플랑크와 함께 베를린 대학교 물리학부에 물리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를 베를린 대학에 초빙한 것은 다름아닌 은사였던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이었다. 이때 라이헨바흐는 상대성 이론 속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해명으로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또 베를린에서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자들의 모임, 이른바 ‘베를린 그룹’을 이끌며, 오스트리아의 ‘빈 모임’과 연계하여 현대 수학 및 자연과학의 철학적 의의 해명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력의 그였기에 물리학 핸드북(백과사전)에 물리학의 철학적 본성 혹은 특징에 관한 단행본 수준의 긴 글을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의 새로운 화해가 요구되는 오늘날, 과학철학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던지는 책이다.
200자평
상대성 이론 및 양자 이론의 철학적 해명으로 이름을 떨친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가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물리학 지식의 핵심적인 특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1929년, 유럽의 물리학 핸드북(백과사전)에 수록되었다.
지은이
한스 라이헨바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는 189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술자가 되기를 꿈꾸어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공학이 스스로의 지적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공을 변경했다. 수학적 확률 이론을 물리적 세계에 적용하는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에를랑겐 대학에서 191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몇 년 동안 통신회사에서 공학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계속했다. 1919년경 베를린 대학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첫 세미나에 참석한 것은 그를 다시 철학계로 돌아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연철학 교수로서 라이헨바흐는 당대의 자연과학자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나누며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이른바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에 나치로부터 추방되기 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에 적용될 수 있는 확률 이론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당시 열띤 논쟁의 주제였던 양자 이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 또한 진행했다. 나치의 정치적 압력을 피해 1933년부터 5년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 철학과 학과장을 맡은 라이헨바흐는, 이 시기에 자신 고유의 확률 이론과 기호 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이러한 작업의 결실은 《확률론》, 《기호논리학 기초》에 담겨 있다.
미국의 철학자 찰스 모리스(C. Morris) 등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193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철학과에 재직하게 된다. 1953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철학적 탐구를 진행했다.
옮긴이
강형구
강형구는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영재학교) 8기로 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며 과학의 역사와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01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진학해 철학을 전공하여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육군 학사장교 46기(정보통신병과)로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현 과학학과)에 진학,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자인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을 연구한 논문 〈라이헨바흐의 ‘구성적 공리화’−그 의의와 한계〉로 2011년 2월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1월부터 2017년 7월까지 교육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했으며, 2017년 7월부터 2024년 2월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연구원이자 학예사로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계속 동 대학원의 박사 과정을 밟아, 논리경험주의의 시간과 공간 철학이 갖는 의의를 연구한 논문 〈상대론적 시·공간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적 해명〉으로 2023년 2월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립목포대학교 교양학부에 임용되어 2024년 3월부터 과학기술철학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분석과 물리적 지식의 인식론〉 등 열여섯 편의 연구 논문을 집필하여 학술지에 게재하였고,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2014년, 지식을만드는지식), 《나우 : 시간의 물리학》(공역, 2019년, 바다출판사),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2022년, 김영사), 《경험과 예측》(2024년, 지식을만드는지식) 등 여덟 권의 과학철학 서적을 번역했다.
차례
제1부 물리적 지식의 일반 이론
제1절 물리적 지식의 가치
제2절 물리학과 다른 자연과학들 사이의 구획
제3절 물리학과 기술
제4절 물리학과 수학
제5절 지각
제6절 실재의 문제
제7절 확률 추론
제8절 진리의 물리적 개념
제9절 물리적 사실
제10절 물리적 정의
제11절 단순성의 기준
제12절 물리적 지식의 목표
제2부 물리학의 개별 원리들 속 경험주의와 이론
제13절 선험성의 문제
제14절 지식 속에서의 이성의 위치
제15절 공간
제16절 공간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과 실재론적 개념
제17절 시간
제18절 시간과 공간 사이의 연관
제19절 실체
제20절 인과성
제21절 인과성의 비대칭성
제22절 확률
제23절 직관적 모형들의 의의
제24절 양자역학에서의 인식론적인 상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분명 물리학은 항상 그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식하지는 않았으며 최소한 모든 개별적인 물리학자들 자신이 이에 대해서 의식하지는 않았다. 비록 이들의 작업이 가장 우선적으로 과학의 목표들을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 마음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마음은 그것의 목적을 분명하게 식별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경로를 따라 이를 추구할 수 있으며, 사실상 자신의 목적을 성찰하기보다는 편안한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경로를 추구하는 사람이 고도로 내성적인 사상가보다 자신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한다.
2.
과학적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전문적인 과학자가 일반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론적 사고의 많은 영역을 인정해 왔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물리적 사실도 이론적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일련의 의식적인 전제들이 과학에 도입되며, 철학 특히 칸트 이후의 철학은 이러한 전제들을 식별해 내는 것을 자신의 핵심적인 임무로서 간주해 왔다.
3.
지각 가능성은 존재의 기준이지만 존재의 정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 개념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많은 철학적 체계들에 포함되어 있다. 설혹 이 체계들이 서로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상당 부분 모순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우리는 과학이라는 도구만을 사용해서는 두 개념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실험을 통해서는 실재론에 의해서 주장되는 의미에서의 대상들이 존재함을 보여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실험에 의해서 제공되는 궁극적 자료는 그 자체로 오직 지각들이며, 이러한 지각들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다른 지각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실재하는 사물들의 존재가 그 어떤 모순에도 맞닥뜨리지 않고 가정되어 왔음을 보임으로써 실재론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험들이 실증주의자의 해석에 유리한 방식으로 손쉽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외부 세계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들의 존재를 주장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