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탄원하는 여인들〉은 기원전 423년 무렵 아테네에서 상연된 작품이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신의 법과 인간의 도리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탐구한다. 극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왕권을 두고 다툰 ‘테베 공격 일곱 장군’ 이야기의 후일담을 다룬다.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고스 장수들의 시신이 테베의 참주 크레온에 의해 매장이 금지된 채 버려지자, 전사자들의 어머니인 ‘탄원하는 여인들’이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모친 아이트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핵심 갈등은 비인도적인 테베의 처사와 이를 바로잡으려는 아테네의 도덕적 신념 사이에서 발생한다. 테세우스는 초기에 타국의 분쟁에 개입하기를 주저하지만 시신 매장이 인간과 신이 공유하는 신성한 불문율이라는 어머니 아이트라의 설득에 마음을 돌린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테베의 전령과 테세우스가 벌이는 설전은 이 극의 백미다. 1인 독재의 효율성을 옹호하는 테베의 사자에 맞서 테세우스는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며 자유로운 투표권과 발언권을 갖는 아테네 민주정의 우월성을 당당히 역설한다. 결국 테세우스는 무력 정복이 아닌 인간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정해 테베를 꺾고 시신을 수습해 온다.
극 후반부에는 상실의 고통과 애도의 정서가 깊게 깔린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들의 절규는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 준다. 비록 아테네 수호 여신 아테나가 아르고스와 아테네의 영구 동맹을 명하며 극이 마무리되지만, 전사자의 아들들이 훗날 복수를 결행할 것이라는 예언은 비극적 전쟁의 순환을 암시한다.
결국 〈탄원하는 여인들〉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절규를 통해 전쟁의 본질적 파괴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약자의 탄원에 응답하고 신성한 법도를 수호하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이상을 형상화한다. 2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200자평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들의 탄원을 통해 인간의 도리와 정의를 묻는 비극. 테베의 매장 금지에 맞서 신성한 불문율을 수호하는 아테네의 테세우스는 민주정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한다. 전쟁의 파괴성을 고발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인간 존엄을 일깨우는 이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지은이
에우리피데스
그리스의 아테나이에서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그리 없다. 다만 부유한 지주 계급 출신이라는 점과 좋은 가문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 정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55년에 데뷔한 이후 92편에 이르는 작품을 집필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18편뿐이다.
소포클레스가 비극 작품을 통해 그리스의 전통적 가치관을 재현했다면,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 가치에 의문을 표하고 비판을 가하면서 진보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극적 수법을 통해 그리스 비극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는데, 인물 묘사의 사실성과 사실적인 재현에 그 어느 작가보다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정념과 여성 심리 묘사에 뛰어난 극작가다.
또한 에우리피데스는 인간 욕망과 폭력성, 사랑과 증오, 인종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의 정념과 억제할 수 없는 폭력에 내재한 비극성을 심도 있게 그려 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가장 비극적인 작가”라고 불렀다.
옮긴이
김종환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네브래스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1986∼2023)하며, 한국영미어문학회 회장과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5년에 재남우수논문상(한국영어영문학회)을 받았고, 1998년에는 셰익스피어학회 우수논문상을, 2006년에는 원암학술상을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된 《셰익스피어와 타자》와 《셰익스피어와 현대 비평》이 있다. 그 외 저서로 《셰익스피어 작품 각색과 다시쓰기의 정치성》, 《인종 담론과 성 담론》, 《명대사로 읽는 셰익스피어 비극》, 《명대사로 읽는 셰익스피어 희극》, 《셰익스피어 비극의 비평적 해석》, 《음악과 영화가 만난 길에서》, 《상징과 모티프로 읽는 영화》가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 23편을 번역했고 《길가메시 서사시》를 중역해 출판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의 현존 작품 전체를 번역했고 〈탄원하는 여인들〉을 끝으로 영역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19편 전체를 완역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서막
제1삽화
제2삽화
제3삽화
제4삽화
종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테세우스 : 절대적 통치자보다
도시에 더 해로운 존재는 없소.
독재 정치를 하면,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법이라는 것은 없소.
독재자 한 사람이 모든 법을 쥐고
뜻대로 하면, 평등은 사라져.
그러나 기록된 성문법을 가진
도시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누려.
가난한 이가 부자에게 모욕당하면,
가난한 이가 부자에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소.
빈자라도 정의에 어긋나지 않으면
부자에게 맞서 이길 수 있으니,
자유와 평등이란 바로 이런 것이오.
“도시에 대한 좋은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시민들 앞에 가져오라.”
그럼, 좋은 생각을 가진 이가 칭찬받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이겠지.
도시라는 공동체에
이보다 더한 공정이 어디 있겠소?
백성이 권력을 쥐고서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 될 때,
젊은이들이 번성하고
기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전력을 다해 일할 것이오.
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