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신화를 부수고 여성성을 탐험하라
남근중심주의를 돌파하는 ‘여성적 글쓰기’
남근중심주의는 인류 역사를 지배해 왔다. 그 위계화된 이항대립 체계는 온갖 상징적 기제를 동원해 여성의 성과 몸을 마치 메두사와 같은 두려운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이 때문에 여성은 여성성을 탐험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어떻게 남성중심적 상징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성 주체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에서 활로를 찾는다. 여성의 성적 특질에 기반한 여성적 글쓰기는 타자를 수용하고 전통적 규범을 위반하는 해방의 공간이다. 식수는 이론 작업뿐 아니라 여러 픽션과 희곡 작품들로 여성적 글쓰기의 힘을 몸소 보여 준다.
이 책은 모든 질곡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꿈꾸는 식수의 사유를 해설한다. 식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적 글쓰기에 도달했는지, 그 주요 개념인 ‘여성적’이란 무엇인지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또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창작자로서 식수의 면모와 ‘프렌치 페미니즘’이라는 딱지에 가려진 식수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식수를 따라 오랫동안 억압받고 소외된 여성의 몸, 그 고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 )
프랑스의 페미니즘 이론가, 소설가, 극작가. 1937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녀로 출생했다. 결혼 후 파리로 이주해 1959년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1968년에는 제임스 조이스를 주제로 국가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1969년 파리8대학 영문과 교수로 임용되어 1974년 유럽 최초로 여성학 박사 과정을 열었다. ‘여성적 글쓰기’ 개념을 주창해 페미니즘 이론에 크게 공헌했다. 글쓰기에 내재한 (성)정치적 측면을 환기하고 여성의 글쓰기가 지닌 특질에 대한 많은 연구와 탐색을 촉발했다. 1969년 소설 ≪내부(Dedans)≫로 메디시스상을 받았으며, 통틀어 40편 이상의 픽션과 14편의 희곡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하다.
200자평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가, 작가 그리고 극작가다. 여성의 성적 특질에 기초한 여성적 글쓰기 개념을 정초하고 이론 작업과 창작 활동으로 직접 실천한다. 남근중심주의의 억압적 상징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여성 주체성을 모색한다. 여성 고유의 목소리를 해방하는 전복적 공간, ‘여성적 글쓰기’로 초대한다.
지은이
이봉지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배재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동 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다. 저서로는 18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허구적 인물인 편집자의 양상과 역할을 연구한 Le Roman à Éditeur와, 이야기가 있는 텍스트의 기능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인 서사학과 여성이라는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연구인 ≪서사학과 페미니즘≫이 있다. 역서로는 엘렌 식수의 저서 ≪새로 태어난 여성≫을 비롯해 ≪쿠데타와 공화정≫,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공역),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공역), ≪수녀≫, ≪조씨 고아≫, ≪캉디드≫, ≪철학편지≫, ≪두 친구≫, ≪각성≫, ≪보바리 부인≫ 등이 있다.
차례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가, 작가 그리고 극작가
01 메두사
02 거세냐 참수냐
03 남근중심주의
04 여성 주체성
05 여성/여성적
06 여성적 글쓰기
07 프렌치 페미니즘
08 픽션
09 연극
10 알제리
책속으로
여성적 글쓰기는 때로 ‘몸으로 글쓰기’로 정의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지나친 단순화라는 우를 범하며 여성적 글쓰기 개념의 전복적 함의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글쓰기’라는 말은 여성적 글쓰기의 중요한 특질을 지적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의 육체적 특성, 그중에서도 여성의 성적 특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식수에 따르면 글쓰기는 성 중립적이지 않다. 지금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남성의 리비도 경제에 기반한 남성적 글쓰기다. 따라서 여성의 몸을 쓰라는 식수의 요구는 오늘날의 지배적 글쓰기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오랫동안 남성들에 의해 억압되어 온 여성의 몸을 탐색하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쓰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_“‘여성적 글쓰기’의 이론가, 작가 그리고 극작가” 중에서
식수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할 수 있듯 여성의 성 역시 독자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식수는 여성들에게 여성성의 은유로 사용된 메두사 신화를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진정한 여성성이 어떤 것인지 탐색할 것을 촉구한다. 이 탐색의 결과로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검은 대륙은 탐험 불가능한 대륙도, ‘검은 대륙’도 아니”며, 메두사 역시 흉측하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메두사를 보려면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_“01 메두사” 중에서
식수에 따르면 이항대립적 글쓰기는 남성의 성적 특질을 닮아 있다. 모든 짝에 우등/열등으로 가치를 매기는 이항대립적 태도는 우등한 것을 위해 열등한 것을 희생시킨다. 글쓰기에서 이러한 특질은 모든 것을 끊임없이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그 태도는 남근에 집중하며, 부분이 전체를 다스리는 독재인 남성의 성욕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식수는 여성의 성적 특질에 기반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즉 “여성은 여성을 써야 하고 남성은 남성을 써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적 특질은 어떠하며, 글쓰기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식수에 따르면 여성의 성의 일차적 특징은 산포다. 즉 여성의 성감대는 남성과 달리 온몸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다.
_“06 여성적 글쓰기” 중에서
“무의식의 장면에서 역사의 장면으로”에서 식수는 자신의 연극적 글쓰기의 기원에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것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너는 글이나 쓰고 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픽션으로는 역사에 도달하기 어려웠다. “역사는 (역사가가 아닌 경우) 텍스트 속에서 시적으로밖에 다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노래로 불리거나 ≪일리아드≫ 같은 서사시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식수는 연극을 만났다. 식수에게 연극은 “아직도 서사시가 존재하는 장소”이자 “모든 타자의 욕망이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였다.
_“09 연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