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전쟁이라는 광기의 시대,
국가를 구하려고 국가를 배신한 어느 지식인의 초상
전후 일본 정신의 버팀목이라 불리는 기노시타 준지는 1962년, 한 문제적 인물의 삶을 무대 위로 소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와 공모해 일본 정부의 기밀을 소련에 넘긴 죄로 처형당한 실존 인물, 오자키 호쓰미가 그 주인공이다. 이 희곡은 암호명 ‘오토’로 활동했던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애국과 매국 사이, 경계에 선 인간
이야기는 소련의 이상을 쫓는 독일인 조르게(존슨)와 일본을 사랑하기에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했던 오자키(오토) 사이의 팽팽한 갈등을 축으로 전개된다. 조르게는 조국보다 이데올로기를 상위에 둔 반면, 오자키는 평범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지배층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작가는 오자키를 일편단심의 영웅이나 단순한 범죄자로 박제하는 대신 시대의 격랑 속에서 번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선택을 지켜 나간 인물로 묘사한다.
희곡은 아시아 침략, 오키나와 희생, 조선 식민지화라는 일본의 ‘세 가지 원죄’를 비추고 있다. 2024년 일본 현지에서 3시간 40분에 달하는 대작으로 다시 무대에 오를 만큼 이 희곡이 지닌 생명력은 여전하다. 광기 어린 군국주의 시절, 국가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한 지식인의 고통스러운 발자취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개인의 양심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200자평
기노시타 준지가 그려 낸 오자키 호쓰미의 내면은 과거 기록을 넘어 현재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희곡은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국가라는 거대 서사 속에 가려지기 쉬운 개인의 실존과 책임을 파고든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개인이 마주해야 할 양심과 선택의 무게를 전한다.
지은이
기노시타 준지
1914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구마모토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36년에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셰익스피어를 전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코이치 이야기(彦市ばなし)〉, 〈빨간 진바오리(赤い陣羽織)〉 등 일본의 민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크게 주목받았고, 그중 대표작 〈유즈루(夕鶴)〉는 일본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다른 대표작 〈자오선의 제사(子午線の祀り)〉에서는 ‘군독(群読)’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되돌아보는 작품도 여러 편 집필했는데, 역사 속에 ‘만약’이라는 질문을 던져 현재를 고찰하고자 했다. 희곡 외에도 평론과 셰익스피어 번역 등을 통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옮긴이
이홍이
이홍이는 번역가, 극작가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울대 대학원 협동과정 공연예술학 석사를 졸업했다.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역서로는 《또 여기인가》(사카모토 유지 저), 《제4간빙기》(아베 고보 저), 《우리별》(시바 유키오 저), 《산책하는 침략자》(마에카와 도모히로 저), 《물의 소리》(나가이 히데미 저), 《비교적 낙관적인 케이스》(오카다 도시키 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안익태/야기 히로시 저), 《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F 저) 등이 있다. 그 밖에 뮤지컬 《데스노트》, 《4월은 너의 거짓말》,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비밀통로》, 《함수 도미노》, 《장소》, 《하늘의 적》, 《상대적 속세》 등을 번역했으며, 연극 《곁에 있어도 혼자》, 《응, 잘 가》, 《남자들》 등을 번안 각색했다. 연극 《나무 위의 군대》, 《外地の三人姉妹(외지의 세 자매)》, 《서재 결혼 시키기》, 《선애에게》, 《목련풍선》 등에는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제3회 청주 창작희곡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I. 1930년대 초엽 상하이
II. 1930년대 중반 도쿄
III. 1940년대 초엽 도쿄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기노시타 준지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자 : 내 말 좀 들어 봐요, 존슨. 일본에서 제가 할 임무는, 일본의 지배층을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하는 거예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지배층이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궁리하는 거예요.
존슨 : 지배층이 가진 힘에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그걸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도 나치스 당원으로 잠입해 들어갈 이유가 없지. 도쿄 주재 독일 대사나 독일 본국의 선전장관을, 내가 왜 절친한 친구로 삼았겠어.
남자 : 우리는 단지 목적이 다를 뿐이에요.
존슨 : 목적? 이봐, 단어 선택 똑바로 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슨 목적이 다르다는 거야?
남자 : 그건 감정, 아니, 감각의…
존슨 : 감정이니 감각 문제를 말할 거면…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 줄게, 넌 국수주의자야!
남자 : 말도 안 돼! 그건… 당신도 단어 선택 똑바로 해요. 당신이 쉽게 독일을 버리듯 내가 일본을 못 버린다고 이러는 거면, 나는 민족주의자라 그래요.
존슨 :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이 두 개를 본질적으로 구분 짓는 지점이 어디에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어? 국수주의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들면, 전체주의자라고 불러 줄게.
남자 : 전체주의? 어떻게, 존슨, 어떻게 나를… 지금, 나치스를 규정지을 때 쓰는 단어로 나를 규정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 122-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