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혼자 수도하는 성자가 하룻밤 동안 겪는 유혹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밤 그가 성경을 읽다가 망상이 시작되고 여자, 금은보화, 진수성찬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환각에 빠져 든다. 밤이 깊어갈수록 환상은 더욱 심해져 그와 종교적으로 대립했던 인물들, 괴기스러운 형상들, 지금껏 지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신 등이 느닷없이 그 앞에 나타난다. 이 헛것들은 서로 아무 인과관계 없이 나타나서는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고 나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여자, 재물, 옛일들은 앙투안이 세상과 절연하고 사막으로 들어가면서 버린 것들이다. 버렸으나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것이다. 즉 그가 보는 헛것들은 그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온갖 욕망의 형태들이다. 그는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고 은둔한 채 수행에 힘쓰고 있지만 사막에서의 한결같은 나날은 오히려 그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앙투안의 욕망은 또한 플로베르의 욕망이기도 하다. 플로베르는 병으로 인해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시골로 들어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재기 넘치는 청년에게 이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브뢰겔의 그림에서 성자를 괴롭히는 이상야릇한 괴물들을 보았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버린 자신의 욕망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강렬하게, 그토록 오랫동안 성자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 앙투안의 유혹≫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로 인해 사실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청소년기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젊은 시절의 그는 평범한 삶과 그에 대한 불만, 권태, 환상, 꿈 등 낭만주의 문학의 모든 주제로 글쓰기를 시도했는데, 이 주제들은 《마담 보바리》에서 《부바르와 페퀴셰》에 이르는 그의 성년기 소설에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는 집필 전의 철저한 조사와 연구, 자연과학자처럼 정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글쓰기에 임하여 사실주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지는 세계, 범속한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일생 동안 매료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성 앙투안의 유혹》이다.
《성 앙투안의 유혹》은 앙투안의 독백, 등장인물들과의 대화 혹은 그들의 대사, 방백과 지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언뜻 희곡처럼 보인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플로베르는 극으로 쓸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희곡으로 보기에는 모호한 점들이 있고, 작가 또한 상연을 목적으로 글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환상극 형식을 취한 소설이다.
200자평
플로베르가 1845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성 앙투안의 유혹>을 보고 강렬한 미적 충격을 경험하고 쓴 작품으로, 혼자 수도하는 성자가 하룻밤 동안 겪는 유혹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작가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되었던 1874년의 결정본을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1849년의 글에 비해 상당히 압축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지적 도정과 사상적 변모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플로베르의 색채가 뚜렷하다.
지은이
귀스타브 플로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는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다. 37세에 처음으로 출판한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1857)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지만, 그전에 오랜 습작 시기를 거쳤다.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작가가 되려 했으나 의사였던 부친의 반대로 법대에 진학했다. 얼마 후 신경 발작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적성에 맞지 않던 학업을 중단하고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때부터 오직 글쓰기와 독서가 전부인 변함없는 생활을 평생 지속했다. 당대의 지방 부르주아 풍속을 꼼꼼하게 그린 《마담 보바리》로 소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소설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심함으로써 소설의 형식, 언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살람보(Salammbô)》(1862), 《감정 교육(L’Education sentimentale)》(1869), 《성 앙투안의 유혹(La Tentation de saint Antoine)》(1874), 《세 단편(Trois Contes)》(1877), 그리고 미완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écuchet)》 등이 있다.
옮긴이
김계선
김계선
김계선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플로베르를 연구하여 〈플로베르와 공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 앙투안의 유혹, 혹은 글쓰기의 유혹〉을 비롯하여 플로베르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프랑스 문화의 이해》(공저)가 있고, 역서로 《부바르와 페퀴셰》, 《살람보》가 있다.
차례
1장
2장
3장
4장 (요약)
5장 (요약)
6장
7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처음에 나는 어느 파라오의 무덤을 거처로 삼았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향료에서 나온 연기로 말미암아 어둠의 밀도가 짙어진 그 지하 궁전에서는 어떤 마법이 떠돌고 있었다. 석관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가 솟아 나오는 걸 들은 적이 있는가 하면, 벽에 그려진 끔찍한 것들이 별안간 살아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홍해 연안의 폐허가 된 성채로 달아났다. 거기서는 돌 틈으로 기어 다니는 전갈을 벗 삼았다. 독수리들이 머리 위 푸른 하늘에서 줄곧 맴돌고 있었다.
2.
갑자기 태만이라는 평소의 죄악으로 빠지셨군요. 무지는 교만의 찌꺼기입니다. “내 신념은 확고해. 왜 논쟁을 하지?”라면서 학자, 철학자, 관례, 알지도 못하는 율법서까지 무시하지요. 스승님은 지혜롭다고 생각하시나요?
3.
오, 행복해라! 행복해! 나는 생명이 태어나는 걸 보았다. 움직임이 시작되는 걸 보았어. 내 혈관의 피가 어찌나 세게 뛰는지 끊어질 지경이다. 나는 날고 싶고, 헤엄치고 싶고, 짖고 싶고, 울고 싶고, 울부짖고 싶다. 나는 날개와 갑각과 껍질을 갖고 싶고, 연기를 내뿜고 긴 코를 갖고 내 몸을 휘게 하고 사방으로 나를 분산시켜 모든 것이 되고 싶다. 향기와 함께 나를 발산하고, 식물처럼 자라고, 물처럼 흐르고, 소리처럼 진동하며, 빛처럼 반짝이고, 모든 형태에 웅크리고, 각각의 원자 속으로 들어가 물질의 근원에 닿고 싶다−물질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