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디어는 결코 ‘새롭지’ 않다
기술 이면의 심원한 시간을 탐사하는 미디어 이론
우리가 아는 미디어의 양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디지털 기기의 매끈한 표면과 ‘새로움’ 뒤에는 물질의 생동 그리고 지층과 광물의 심원한 시간이 있다. 유시 파리카는 다양한 비인간 존재가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기술과 문화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구성하는지 밝힌다. 시간성을 재구성하고 기술의 물질적 기원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첨예한 전 지구적 문제들을 비인간 작용과 엮는다. 미디어가 되기 이전 상태부터 버려진 이후까지 미디어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파리카의 탐색은 ‘미디어자연’으로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미디어 뒤에 ‘고고학’, ‘생태학’, ‘지질학’ 등을 붙이는 작명에서도 드러나듯 파리카는 학문 간 경계를 가로지르며 미디어 문화를 지구 행성 규모로 확장해 포괄적으로 이해한다. 이 책은 파리카의 박사 논문 주제인 컴퓨터 바이러스부터 최근 천착한 가동적 이미지까지 파리카의 광범한 탐색을 열 가지 키워드로 조망한다. 파리카가 미디어로 그리는 문화역사의 새로운 지도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파리카와 함께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세계를 깊숙이 이해해 보자.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 1976∼ )
핀란드 출신 문화역사가. 현재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의 디지털미학·문화학과 교수이자 영국 사우샘프턴대학교의 방문연구교수로 있다. 환경 미디어와 기술 문화를 연구한다. ≪미디어고고학이란 무엇인가?≫(2012) 등으로 미디어고고학 담론을 주도적으로 생산했고, ≪미디어의 지질학≫(2015)을 비롯한 미디어 생태학 삼부작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가동적 이미지: 시각에서 비시각으로≫(2023), ≪살아 있는 표면: 이미지, 식물, 미디어 환경≫(공저, 2024) 등으로 동시대 인문학의 저변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미디알레 2023을 포함한 여러 예술 기획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200자평
유시 파리카는 다양한 비인간 존재가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기술과 문화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구성하는지 밝히는 문화역사가다. 미디어가 되기 이전 상태부터 버려진 이후까지 미디어의 전 과정을 탐색하며 동시대의 다중적 시간성을 드러낸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세계를 깊숙이 이해할 수 있다.
지은이
심효원
미디어연구자. 현재 연세대학교 매체와예술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비판적’ 기호식: 예수, 인디오, 식물의 세 가지 경우”, “식물의 가상적 이미지”, “공동체적 행위로서의 후각” 등이 있고, ≪물질의 삶≫,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등에 공저로 참여했다. 유시 파리카의 “수천 개의 작은 미래들”, ≪미디어의 지질학≫, ≪잔여≫(공역), ≪동시대의 느린 폭력≫, ≪미디어고고학이란 무엇인가?≫(공역)를 포함한 여러 글과 책을 번역했다.
차례
미디어로 그리는 문화역사의 다른 지도
01 바이러스와 곤충 미디어
02 미디어고고학
03 미디어 지질학과 심원한 시간
04 미디어자연
05 인류세와 인류외설
06 미디어의 느린 폭력과 비시각성
07 계획적 구식화와 블랙박스
08 좀비 미디어와 서킷벤딩
09 잔여
10 가동적 미디어
책속으로
파리카는 기존 역사주의적 시간관, 즉 선형적 진보 서사로서의 시간에 의문을 제기하며, 미디어의 물질적 잔여, 과거의 데이터, 실현되지 못하거나 잊힌 과거의 사례, 비인간 시간성을 발생시키고 가동하는 동시대 미디어 등을 통해 현재를 비판적으로 되묻는다. 이는 문화를 인간사나 인간 감각을 뛰어넘는 규모, 즉 지구 행성 규모로 확장해 이해하면서 그것을 인간 중심의 기존 문화사와는 다른 역사적 관점에서 맥락화하는 작업이다. 파리카는 물질성과 관련 개념들을 기존 인식을 전복해 다양한 갈래의 질문과 논의를 여는 진입구로 삼는다. 미디어 뒤에 ‘고고학’, ‘생태학’, ‘지질학’ 등을 붙이는 작명에서도 드러나듯, 이는 학문 간 경계를 가로지르는 시도이기도 하다.
_“미디어로 그리는 문화역사의 다른 지도” 중에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디어고고학이 미디어에서 연상되는 구체적인 하드웨어 장치와 유물론에 기반한 문화의 이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디어고고학에서 하드웨어와 그 문화는 동시대적 시간성을 발현하는 속성의 근원으로서 시간 결정성과 미시적 시간성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중첩하는 다중적 시간성을 구동하고 드러낸다. 동시대적 시간성에 대한 파리카의 이러한 주장은 동료 학자 에른스트의 주장을 차용한 것이다. 여기서 시간 결정성이란 시간이 동시대 연산 기계에 내장되어 있고 기계가 자체적으로 생성하는 고유한 작용임을 의미한다. 한편 미시적 시간성은 기계가 구현하는 시간이 인간의 감각 체계가 지각하기 어려운 임계치 이하의 빠른 속도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기존 역사적 시간성과는 다른 층위의 시간 개념을 요구하며, 심지어 기계의 고유한 시간성을 기존 ‘역사’에 포섭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_“02 미디어고고학” 중에서
미디어가 자연이고 자연이 미디어인 미디어자연에서 채굴, 제작, 사용, 폐기의 순환은 점점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이에 주목하는 것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로 본격화된 문화, 즉 자연에 자원의 의미를 덧씌우는 미디어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파리카의 시도는 그러한 취지에서 디지털 기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물질과 얽힌 사회·문화·정치적 상황을 살피고, 시시때때로 쇄신되는 기술이 조장하는 디지털 기기의 ‘새로움’이라는 이미지를 전복한다. 시간적 차원에서는 현재 미디어 문화에 겹쳐진 아주 오래된 역사와 아주 먼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_“04 미디어자연” 중에서
광고에서 강조되는 ‘무선’, ‘경량성’, ‘얇아진 두께’는 수리와 장기 사용을 어렵게 하는 하드웨어 디자인과 직결된다. 이런 기술의 전개 양상이 결함의 보완 즉 진보로 제시된다면 그것이 무엇에 대한 진보인지 근본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가볍기 때문에 이동하기 편하고 선이 없기 때문에 더 깔끔한 것이 진보인가? 기술과의 직접 접촉을 차단하고 사용자가 기술의 본질에 대해 직접 생각해 볼 수 없게 한다면 오히려 퇴보에 가깝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가볍고 선이 없고 얇은 것을 진보로 간주해 왔다면 그 진보의 기준은 우리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여기도록 유도된 것인가?
_“07 계획적 구식화와 블랙박스” 중에서
가동적 이미지는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 결정을 나타낸다. 행성 규모의 이 거대한 가동 속에서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스며든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는 시대가 아니라 이미지 속에서 사는 시대를 살아간다. 따라서 가동적 이미지 연구는 시각 이미지나 미디어 연구의 범주를 넘어 동시대 기술과 문화 전반을 매개하는 역학과 권력관계, 그것들의 시각성과 비시각성을 거시적으로 탐구하는 문화적 기획이다.
_“10 가동적 미디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