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논해야 한다
실천의 무게를 짊어지는 실존의 철학
탈인간을 주창하는 표어들이 남용되는 가운데 ‘인간’이라는 개념은 의문시되고 해체되며 급기야 수치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주의 깊게 탐색된 적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외면한 채 그 자리를 기술·시스템·알고리즘에 이양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며, 주체이고, 인간 주체인 한에서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장폴 사르트르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관계하고, 그 세계 속에서 책임지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지 물었다. 인간이 자신을 초월해 존재를 선택하고, 그 선택의 총체로서 자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열 가지 키워드로 탐색한다. 사르트르가 후설 현상학의 ‘지향성’ 개념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 어떤 맥락에서 상상력을 인간 존재의 자유로운 본성을 상징하는 능력으로 격상했는지, 자기기만이 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 조건인지, 인간이 어째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인지 살필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철학은 삶을 구성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 작업은 본질적으로 참여적이다. 사르트르를 따라 인간의 조건을 다시 성찰하고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다시 세워 보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독자적인 실존주의 철학을 정립했다.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모리스 메를로퐁티, 레몽 아롱 등과 교류했다. 1929년에는 평생의 지적 동반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나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공동의 철학적 탐구를 이어 갔다. 대표적 철학 저작인 ≪존재와 무≫(1943),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에서 인간 자유의 본질, 주체의 자기 형성, 타자와의 관계, 실존적 책임 등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소설, 희곡, 문학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문학적으로 확장했다. 대표적 문학 작품으로는 ≪구토≫(1938), ≪닫힌 방≫(1944), ≪자유의 길≫ 삼부작(1945∼1949) 등이 있다. 1945년 문예지 ≪현대≫를 창간해 문학, 철학, 정치 담론을 가로지르는 공론의 장을 열었다. 지식인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사회적 모순에 침묵하지 않고 선두에서 발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알제리전쟁에 반대하고 식민주의를 비판했으며, 1964년에는 제도화된 명예와 권위를 거부하는 신념의 표현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절했다. 20세기 지성사에서 ‘실천하는 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
200자평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천착한 철학자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관계하고, 그 세계 속에서 책임지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지 성찰했다. 이 책은 열 가지 키워드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해설한다. 인간의 조건을 다시 성찰하고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다시 세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지은이
이솔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장폴 사르트르와 질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을 비교 분석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있으며, 서강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을 다룬 논문으로는 “사르트르의 이미지 이론에서 아날로공(Analogon) 개념의 의미”(2013), “사르트르와 유아론(solipsisme)의 문제”(2016), “사르트르와 윤리의 문제: 자아를 넘어선 초월의 가능성”(2018), “사르트르 철학에서 대상화의 문제: 누스바움의 대상화 이론에 대한 비판”(2023), “사르트르 상상력 이론에서 예술작품의 문제”(2024), “사르트르와 동물 타자의 문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2024), “사르트르 철학에서 감정의 문제: 감정의 초월성”(2024) 등이 있다. 장폴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2017)을 공역했으며, 공동 저서로는 ≪사르트르의 미학≫(2017), ≪놀이꾼의 상상력≫(2025), ≪비평가 들뢰즈≫(2025)가, 단독 저서로는 ≪이미지란 무엇인가≫(2023)가 있다.
차례
왜 ‘지금’ 사르트르인가
01 의식
02 자아의 초월성
03 상상
04 실존
05 자기의식
06 자기기만
07 무
08 타자
09 휴머니즘
10 참여
책속으로
우리는 사르트르를 뼈아픈 성찰의 대상으로서 대면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은 채 인간 개념을 해체하고 탈ᐨ인간과 반ᐨ인간주의를 주창하는 손쉬운, 그러나 무책임한 답변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사르트르가 요구한 것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다시 신성화하거나 복권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무게와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는 인간을 실천의 무게를 짊어진 주체로 다시 사유하는 일이다. 오늘날 인간 주체가 위기에 직면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개념이 낡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외면한 채 그 자리를 기술·시스템·알고리즘에 이양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가속화, 빈발하는 기후 위기,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선택하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인간 주체의 질문이며, 우리가 오래도록 잊고 있었으나 사르트르 철학을 통해 비로소 다시 마주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_“왜 ‘지금’ 사르트르인가” 중에서
사르트르는 ‘상상’이 사유 그리고 지각과 구분되는 독자적 인식 능력이며, ‘이미지’ 역시 실재를 모사한 재현이 아니라 상상이라는 특수한 인식 행위의 대상임을 보여 준다. 이를 위해 사르트르는 ‘아날로공’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금껏 사람들이 ‘이미지’로 착각해 온 것은 사실 ‘아날로공’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아날로공이란 무엇인가? 아날로공은 상상 이미지가 성립하기 위한 매개 혹은 지지체를 의미한다. 예컨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옛 친구의 얼굴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친구의 얼굴을 지각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매개적 대상(영상, 사진, 초상화, 캐리커처 등)이 바로 아날로공이다. 아날로공은 지각적 대상을 닮은 유사물로, 상상을 위한 기반이 되지만 그 자체로 상상의 대상은 아니다.
_“03 상상” 중에서
사르트르는 불안을 피하거나 덜어 내기 위해 우리가 의지하는 통상적 근거, 예컨대 절대선, 신의 섭리 또는 생물학적 본성 같은 것들을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인간 실존의 본질을 사유한다. 불안은 인간 존재가 피할 수 없는 근본적 정서다. 인간은 도피할 수 없는 자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신이나 본성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때 생겨나는 정서, 곧 전적인 책임의 정서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불안은 자유의 증거이자 그 무게를 의식하는 주체적 존재로서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실존의 핵심 정서다. 불안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실존의 명령과도 같다. 인간은 곧 자기 자신의 입법자이며, 바로 그 자유 속에서 인간은 실존한다.
_“04 실존” 중에서
사르트르에게는 철학도 문학도 모두 참여의 한 형식이었다. 철학은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괴리된 추상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요청에 대한 응답이어야 했으며, 문학은 아름다운 문장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에 말을 거는 행위여야 했다. 이로써 자유의 존재론은 곧 책임의 윤리로 이행한다. 사르트르에게 철학은 삶을 구성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 작업은 본질적으로 참여적이다. 철학은 삶을 초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방종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 속에서 실천적 결단을 요구하는 윤리적 철학이다.
_“10 참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