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형제의 칼날에 두 눈을 잃은 안평국 왕자 적성의의 고난과 탐색의 서사
최선본 완판 74장본을 저본으로 삼아 원전을 완벽하게 복원
효(孝)를 주제로 하는 고전소설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뜨리는 조선 후기 소설이다. 《적성의전》은 표면적으로는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서역에 다녀오는 효행 설화를 따르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과 한 인간의 재기(再起)를 다룬다. 단순히 교훈적인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모험을 통해 흥미진진한 영웅 서사로 확장되는 《적성의전》은 필사본과 방각본, 구활자본 등 무려 80여 종에 이르는 이본이 유통될 만큼 당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한국 고전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적성의전》은 무능하고 악한 형 ‘적항의’와 유능하고 효심이 깊은 ‘적성의’, 즉 악형선제(惡兄善弟)의 갈등과 그 귀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친이 갑자기 병을 얻자 불과 12세의 어린 왕자 적성의는 수만 리 떨어진 서역으로 묘약 ‘일영주’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묘약을 얻어 돌아오던 성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형 항의의 잔혹한 음모였다. 항의는 동생의 공을 가로채기 위해 그의 두 눈을 도려내고 차디찬 바다에 버리는 패륜을 저지른다. 형의 배신으로 두 눈을 잃고 표류하는 성의의 시련은,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죽음의 문턱에서 성의를 구한 것은 호 승상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성의는 낯선 이국땅에서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중국 황실의 채란 공주와 운명적인 연을 맺는가 하면, 기러기 편에 날아온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기적적으로 눈을 뜨기도 한다. 이후 과거에 급제해 부마(駙馬)가 된 성의는 채란 공주와 함께 금의환향 길에 오른다. 하지만 동생이 살아 돌아오면 자신의 만행이 드러날까 두려워진 적항의는 또다시 자객을 보내는데…. 과연 적성의는 마지막 시련을 이겨 내고 무사히 왕좌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은 학계로부터 최선본으로 평가받는 완판 74장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적성의와 채란 공주의 애틋한 결연 과정이나 형이 보낸 자객들과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 등이 여타 이본에 비해 월등히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전하는 《적성의전》 중 서사의 밀도가 가장 높고 풍성하다. 이번 번역은 1994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이 작품의 역주서를 펴내며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헌홍 교수가 다시 한 번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 원전의 맛을 살린 전문적인 번역으로 《적성의전》의 원형을 충실히 복원해 냈. 2025년까지 축적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논문에 준하는 상세한 해설은 작품을 깊이 있게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모자람 없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00자평
“태항산 높은 봉은 하늘에 닿았고, 약수 얕은 물은 날짐승의 깃을 잠그는도다. 망령된 저 아이야, 일엽주 네가 타고 어디로 향할꼬?”
지극한 효심으로 수만 리 떨어진 서역에서 어머니를 살릴 묘약 ‘일영주’를 구해 돌아오던 길. 안평국 왕자 적성의는 형의 칼날에 두 눈을 잃고 차디찬 바다에 버려진다. 세상 모든 빛을 잃고 파도 소리에만 의지해 표류하던 그는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낯선 땅에서 다시 일어선다. 마침내 닫혔던 눈을 뜨고, 채란 공주와 결혼해 중국 황제의 사위가 된 적성의. 그는 빼앗긴 왕좌를 되찾을 수 있을까?
지은이
작자미상
미상.
옮긴이
이헌홍
이헌홍(李憲洪)은 194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부터 2013년까지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다. 재직 중에 부산대학교의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과 국제교류교육원장을 겸임한 바 있다. 이와 함께 타이완의 국립정치대학 한국어문화학과 초빙교수를 역임하고, 한국문학회 회장을 맡는가 하면, 제59회(2009) 부산광역시 문화상(인문과학 부문)을 받은 바도 있다.
저서로는 《고전소설 연구입문》(1996), 《한국 송사소설 연구》(1997), 《동북아시아 한민족 서사문학 연구》(2005), 《고전소설 학습과 연구》(2011), 《중국조선족 이야기꾼 김태락의 구연설화》(2012), 《재일한인의 생활사 이야기와 문학》(2014), 《중국조선족 이야기꾼의 구연설화》(2023) 등이 있다. 이밖에도 몇몇 공저와 역서, 그리고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적성의전
상권
하권
원문
뎍셩의젼 권지상(卷之上)
뎍셩의젼 권지하(卷之下)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때 항의 무사를 눈 주어 성의를 죽이려 할새, 무사 중에 태연이라 하는 사람이 대호 왈,
“세자 비록 왕명을 칭하나 어찌 동기간 윤기를 생각지 아니하느뇨? 공자는 지극한 효자시라, 세자 어찌 인정이 여차(如此)하뇨?”
하고 칼을 들어 모든 무사를 물리치니, 항의 불승분노하여 달려들어 성의 두 눈을 칼로 찔러 빼니, 배 안에 엎더지며 양안(兩眼)에 피가 흘러 옥면(玉面)을 적시는지라. 성의 탄 배 조각을 깨쳐, 한 조각 위에 앉히고 물결 위에 밀치니, 아지 못겨라. 그 사생(死生)을 뉘라서 알리오? 천지(天地) 신명(神明)하사 효자를 보존케 하실까 종말을 두고 볼지어다.
– 본문 37∼38쪽 중에서
“성의야, 어린 네가 어미를 위하다가 도인의 말을 듣고 서역이 어디라고? 창파만경은 하늘에 닿았고 운산(雲山)이 첩첩하여 행방을 모르는데, 악수일별 떠난 후로 종적이 영영 끊겼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극락 서역에서 불법(佛法)에 최미하였다더니 그 말이 정녕하냐? 약을 얻어 오는 길로 수적(水賊)을 만나 죽었느냐? 약수를 못 건네고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었느냐? 정녕(丁寧)이 죽었거든 혼백이라도 보자꾸나.”
항의의 불칙한 소위(所爲)는 의심은 있건마는 행색이 탈루(脫漏)치 아니하니 어찌 짐작하리오? 왕비 차탄(嗟歎)을 마지아니하시더니…
– 본문 73∼74쪽 중에서
이때 성의 정신을 진정하여 편지를 듣기를 다하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간장이 녹는 듯, 일변 반갑고 일변은 슬픈지라. 정신이 쇄락하여 바삐 일어나 편지를 향하여 사배하려 할 제, 문득 두 눈이 불빛이 일어나며 번개같이 뜨이니, 비컨대 청천백일이 흑운을 헤침 같고, 칠야 삼경에 명월(明月)을 대한 듯, 일변 반갑고 길거운 마음을 어찌 다 성언하리오. 천지 감동하사 상한 눈을 다시 보니 일월이 명랑(明朗)하여 의구히 비치도다. 생시인지 몽중인지 깨닫지 못할러라. 정신이 쇄락하여 좌중을 살펴보니 일위 공주 시녀를 데리고 화문등메금나석상에 단정히 앉았으니 옥안운빈이며 천태만교가 진짓 절대가인이요 만고의 절색이라. 양태 진실로 월나라의 서시 같고 월궁항아 광한전에 조회하는 듯, 서왕모 요지연에 배설한가 싶도다. 기러기 편지를 전하니 정녕 요지연이로다.
– 본문 95∼97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