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원폭의 참상을 최초로 증언한 금지된 기록
1945년 8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인 원자폭탄 투하가 히로시마를 덮쳤다. 그 지옥 같은 현장 한가운데서 살아남은 쇼다 시노에(正田篠江)가 피폭 체험을 31자의 짧은 정형시, 단카(短歌)에 담아낸 가집 《참회(さんげ)》를 국내 최초로 완역 소개한다.
이 책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다. 1947년,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의 엄격한 검열하에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단 100부 남짓 비밀리에 인쇄된 ‘금지된 기록’이다. 저자는 “번쩍 쾅” 하는 섬광의 순간부터, 불길을 피해 강물로 뛰어든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끔찍한 고통을 마치 사진을 찍듯 생생하고 즉물적으로 포착했다. 미사여구를 배제한 거칠고 핍진한 묘사는 그 어떤 서사보다 강력한 리얼리티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한다.
《참회》는 전후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피해자 의식’이나 거창한 반전 평화 구호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책망해야 할 대상 속에는 자신도 있다”며 전쟁에 협력했던 과거와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의식을 깊이 성찰한다. “무기를 들지 않는 대참회의 마음”을 노래한 그의 시선은, 원폭의 비극을 단순한 피해의 호소가 아닌, 전쟁 책임에 대한 자각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처절한 물음으로 승화시킨다.
이번 완역본은 저자의 해설과 수정이 반영된 1962년 재수록본을 저본으로 삼아 이해를 도왔으며, 초판본과 대조해서 빠진 작품까지 복원해 완전성을 기했다. 또한 저자의 에세이와 관련 시를 함께 수록해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원폭 투하 80년, 핵무기의 위협이 다시 고조되는 오늘날, 《참회》는 우리에게 묻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가?’ 이 책은 일본만의 기록이 아닌, 인류의 과오를 기억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할 뼈아픈 역사의 증언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한 《히로시마라고 말할 때(ヒロシマというとき)》[구리하라 사다코(栗原貞子) 지음, 이영화 옮김, 2016], 《시체의 거리(屍の街)》[오타 요코(大田洋子) 지음, 정향재 옮김, 2024], 《하라 다미키 단편집(原民喜短篇集)》[하라 다미키(原民喜) 지음, 정향재 옮김, 2016] 등과 함께 읽으면 원폭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0자평
1945년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 쇼다 시노에의 가집 《참회》를 국내 최초로 완역 소개한다. 1947년 엄혹한 검열 속에서 비밀리에 출판된 이 책은, 원폭 투하 직후의 참상과 생존자들의 처절한 고통을 100수의 단카(短歌)에 사진처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단순한 피해 호소를 넘어 전쟁에 대한 책임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깊이 성찰하며 ‘참회’의 마음을 노래한다.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고 인류애 회복을 호소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지은이
쇼다 시노에
쇼다 시노에(正田篠枝, 1910∼1965)는 히로시마현 에다시마시(江田島市)에서 태어났다. 아키(安芸)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22세에 결혼했지만 일찍 사별했고,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가업을 도왔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제분업을 경영해 왔지만 부친이 1920년대에 들어 철공소를 열고 용접과 소형 선박의 엔진 수리 등을 시작했다. 전쟁 중에 어선의 엔진을 개량한 제품이 육군의 상륙용 주정(舟艇)에 채용되면서 크게 번창했다. 군수 물자 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것인데, 이러한 직접적 전쟁 협력 행위는 뒷날 스스로를 가해국 국민으로 인식하게 되는 바탕이었다고 여겨진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쇼다는 폭심지에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자택에서 부친과 함께 피폭당했다. 건물 붕괴로 인한 열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 피난길에 올랐는데, 공장은 무너지고 쓸 만한 가재도구와 귀중품은 피난 중에 모두 도난당했다. 당시는 방사선 피해에 대한 지식이 없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얼마 후 부친이 위암을 선고받았고, 자신도 악성 빈혈과 이명, 만성 쇠약 등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1948년 재혼해 차남을 낳았으나 얼마 안 가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 이후 홀로 장남을 양육하며 여관을 운영했는데, 부친의 병원비로 사용한 대출금을 갚지 못해 늘 생활고에 쫓겼다. 1953년부터는 원폭 후유증이 심해져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나날이었다. 이 무렵 루이주(涙珠)라는 법명을 받고 유발 비구니가 되는데, 독실한 불자였던 그녀의 인생관은 정토진종을 교육 이념으로 한 여학교에서 비롯한 것이다. 1963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에는 치료를 거부하고 창작 활동과 사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기도에 전념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30만 회 쓰는 ‘30만 명호 서사(書寫)’를 발원하고 사망 5개월 전에 마침내 완성했다. 그 장절한 과정과 투병 기록은 NHK 다큐멘터리로 2회에 걸쳐 방영되었다(1965. 4/11). 1965년, 향년 54세로 영면했다.
단카를 창작하기 시작한 것은 20세 무렵부터로, 잡지에 투고하며 야마즈미 마모루, 스기우라 스이코 등에게 사사했다. 원폭 투하 직후부터 창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참회》의 작품에도 불교 사상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다. 특히 가집의 간행과 배포가 사망자에 대한 애도와 고통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그녀에게 단카의 창작은 단순한 문학 활동을 넘어 구도적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고 여겨진다. 1959년 ‘원수폭 금지 어머니회’ 결성에 참여해 반핵·평화 운동 및 일본의 재군비 추진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도 그 연장으로 볼 수 있다. 1961년부터는 기관지 《히로시마의 강(ひろしまの河)》 발행에 관여해 단카 외에 시, 동화 등도 발표했다. 여관을 운영하며 만난 히로시마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기억하고, 전쟁과 원폭의 두려움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1주기에 맞추어 유고집으로 《백일홍−이명 이후(百日紅−耳鳴り以後)》와 동화집 《피캇코 짱(ピカッ子ちゃん)》이 발간되었다. 동화집을 편집한 구리하라 사다코는 쇼다와 원수폭 금지 운동을 함께한 동지이자 진정한 이해자로서, 반핵·반전 운동 과정에서 그녀의 삶과 작품을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원폭 문학사는 구리하라를 피해자이기 이전에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폭자’라는 인식을 표현한 선구적인 작가로 기록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참회》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구리하라의 대표작 〈히로시마라고 말할 때(ヒロシマというとき)〉는 쇼다와의 인연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옮긴이
박지영
박지영(朴智暎)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원 비교 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자기 인식에 대한 고찰〉을 쓰면서 단카와 인연을 맺은 이후 현재까지, 일본인과 일본 문화,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 통로로서 단카 연구를 이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인하대학교에서 인문 사회 학술 연구 교수로서 단카를 통한 전쟁 기억의 구축과 계승 양상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주요 관심사는 일본 사회에서 가해의 기억이 자기 정체성으로 상기되고 계승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으로, 쇼다 시노에의 《참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준 책이다.
저서로 《부흥 혹은 멸망의 근대 문학−시조와 일본 단카의 비교 연구》(우리영토, 2024), 옮긴 책으로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헝클어진 머리칼》(지식을만드는지식, 2022 개정) 등이 있으며, 논문 〈기억 장치로서의 단카−일본 사회의 집단 기억과 정체성 형성의 기제〉(《세계문학비교연구》 75, 2021), 〈전쟁 단카의 수용 양상과 일본의 역사 인식〉(《외국문학연구》 87, 2022), 〈전쟁 단카와 가해의 기억−트라우마 체험의 이해와 성찰의 형식〉(《인문과학》 133, 2025) 등을 저술했다.
차례
참회
서문
원폭 투하
지옥의 히로시마
임시 치료소
전쟁 때문인가
살아남은 자의 고통
애처로운 근로 봉사 학도여
희생 학도의 어머니
가난한 학도의 어머니
이재민 수용소
전재고아 수용소
혈육이 찢어지는 탄식
불쌍한 몸
멸망하는 세계
복원병
조용한 자연
아귀의 모습
원폭 전날의 회고
원폭 후유증 임상기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것
가집 《참회》의 삽화에 대해
가집 《참회》의 서문에 대해
가집 《참회》의 제목에 대해
가집 《참회》의 발행일에 대해
부록−에세이
피폭의 계보−나의 경우
‘피카동’ 전후
죽음의 거리
부록−시
모기장의 걸고리
주둔군
아버지의 죽음
쌀
손님을 나무라다
왜 이렇게 나른한 것일까
방사선 장해
혹
오해
종이학
목편을 찾는 소년
눈을 뜨고 자는 교코
특효약
평화대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번쩍 쾅
그리고 순간 정적
눈을 떠 보니 펼쳐진 수라장에 처참한 신음 소리
ピカッ ドン 一瞬の寂 目をあけば 修羅場と化して 凄惨のうめき
하늘 위에서 수많은 악귀들이
독 항아리를 엎어 쏟은 것일까
검은 비가 내린다
·검은 비가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석유다, 석유다,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석유인 줄 알았습니다.
天上で 悪鬼どもが 毒槽を くつがへせしか 黒き雨降る
석탄이 아닌
새까맣게 타 버린 인간이라네
빼곡히 쌓아 올린 트럭이 지나간다
石炭にあらず 黒焦の人間なり うずとつみあげ トラック過ぎぬ
자식과 남편 일곱 명의 가족을
불길 속에서 놓치고 도망쳐 온 여자
얼이 나갔네
七人の子と 夫とを 焔火の下に置きて 逃げ來し女 うつけとなりぬ
우리 국민들
무기를 들지 않는
대참회의 마음을 갖고 깊은 믿음 속에 살리라
·원자폭탄에 짓밟힌 나는 부지불식간에 짓밟았던 과거를 생각하고, 참회의 마음으로 무기를 가지지 않는 국민으로 일어나 겸손하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武器持たぬ 我等国民 大懺悔の 心を持して 深信に生き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