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취리히 여행〉은 불치병을 앓는 유명 여배우 플로랑스가 스스로 존엄사를 결정하고, 아들 부부와 절친한 친구를 동반해 조력사가 허용되는 스위스 취리히로 떠나는 마지막 3일간의 여정을 담은 아름답고도 강렬한 희곡이다. 프랑스 연출가 프랑크 베르티에가 실제 친구였던 여배우 마이야 시몽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202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에밀 오지에 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극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코 어둠에 침잠하지 않는 유머와 우아함을 보여 준다.
작품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자동차 여행을 거쳐 취리히의 임종 장소에 이르기까지를 5막의 로드 무비 형식으로 그려 낸다. 평생 무대 위에서 수없이 죽음을 연기해 온 배우 플로랑스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마저 삶의 주체적인 예술로 완성하고자 한다. 그녀에게 이 여행은 단순히 생을 마감하는 절차가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들과 감정을 정리하는 가장 능동적인 선언이다. 그 곁에는 어머니의 결정을 끝까지 되돌리려 애쓰는 아들 뱅상과 사랑과 분노 사이에서 고통 받는 며느리 마틸드, 그리고 예술적 동지로서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친구 이자가 함께하며 ‘남겨진 자들’이 겪는 상실과 수용의 과정을 현실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플로랑스에게만 보이는 신비로운 인물 ‘천사-까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이 여행을 시적 공간으로 확장한다. 임종 직전, 그녀가 과거에 연기했던 체호프의 《갈매기》, 사르트르의 《파리 떼》 속 동물들이 언급되는 장면은 그녀의 죽음이 연극적 삶의 고귀한 연장선임을 상기시킨다. 〈취리히 여행〉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의 본질적인 가치를 묻는다. 죽음의 결정이 오히려 현재의 가치를 눈부시게 조명하는 이 역설적인 생명의 찬가는, 독자들에게 품격 있는 슬픔과 뜨거운 위로를 동시에 선사할 것이다.
200자평
불치병을 앓는 여배우 플로랑스가 존엄사를 위해 가족, 친구와 스위스 취리히로 떠나는 3일간의 여정을 담은 실화 바탕의 희곡. 2022년 ‘에밀 오지에 상’을 수상했다. 5막 로드 무비 형식을 통해 죽음을 주체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준다.
지은이
장브누아 파트리코
프랑스 극작가·소설가·시나리오 작가다. 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고등학생 시절에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간직해 두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답신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약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 논문 주제는 〈수면에서 신경 전달 물질의 역할−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작품 속 한밤의 수면 분석을 통해〉였다.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그는 연극과 문학 활동을 이어 갔다. 카슨 매컬러스의 〈세계의 제곱근(La Racine carrée du merveilleux)〉과 호러스 맥코이의 〈우리는 말을 끝장낸다(On achève bien les chevaux)〉를 연극으로 각색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첫 소설 《왕은 나다(Le roi c’est moi)》가 뷔셰-샤스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문학·극작·시나리오를 넘나드는 창작 활동과 과학적·학문적 배경이 극작가로서 정체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문학, 과학, 예술적 참여가 교차하는 독특한 여정”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희곡 작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소방관들(PompierS)〉로 보마르셰 협회의 집필 지원과 CNT 및 아르세나의 후원을 받았다. 특히 〈다리우스(Darius)〉(2017)는 두랑스-보마르셰 SACD상을 수상했다. 〈소방관들〉, 〈다리우스〉는 2016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파리에서도 공연되었고 순회공연으로도 이어졌다. 〈소방관들〉은 카탈루냐어로 번역되어 바르셀로나 아카데미아 극장을 비롯해 다수의 학교와 축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2019년, 〈소방관들〉은 카트린 쇼브 연출로 파리 롱포엥 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이어 이 연출과의 협업으로 〈올드 업(Old Up)〉을 창작했다.
약학 박사 출신으로, 의학적 지식과 인간 심리학의 감각을 결합한 드라마를 쓰기도 한 그의 작품 세계는 삶과 죽음, 몸과 감정의 경계에 대한 탐구로 일관되어 있다. 〈다리우스〉와 함께 〈취리히 여행〉은 “존엄사”라는 윤리적 주제를 섬세한 정서와 시적 언어로 다룬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취리히 여행〉의 경우 2021년 안시의 국립 무대 봉리외에서 초연되었으며, CNL의 극작 지원을 받았다. 2022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수여하는 에밀 오지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해 앙드레 넬망 연출로 다시 만들어진 〈다리우스〉는 공연에 성공해 2022∼2024년 아비뇽 OFF페스티벌에 연속 참가했으며 이후 파리에서 자주 공연되었다. 또한 자신의 작품 〈라쿠아보니스트(L’Aquoiboniste)〉(에밀 졸라 단편에서 영감을 얻은 희곡)를 데피센 극장, 2022년 아비뇽 OFF페스티벌, 파리 센 리브르에서 직접 연출하며 연출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 2023년에는 오를레앙 CADO 극장에서 〈아가트 루아얄(Agathe Royale)〉이 크리스토프 리동 연출로 초연되었고, 2024년에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저녁식사(Le Diner)》를 각색한 작품이 브루노 솔로 출연, 카트린 쇼브 연출로 아틀리에 극장 무대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에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폴록 형제들(Les Frères Pollock)〉 낭독 공연을 직접 연출했다. 소설과 연극 외에도 그는 다수의 라디오 드라마(20편 이상)를 프랑스 앵테르 방송을 통해 발표했으며, 아동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프란체스카 폴록과 공동 집필한 아동서 《페르디낭을 만나서(À la rencontre de Ferdinand)》에서는 삽화도 직접 맡아 그림과 글을 함께 선보였다. 이 작품에는 장애를 다루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2025년 6월, 프랑스극작가협회(Écrivains Associés du Théâtre(E.A.T)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임혜경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프랑스언어문화학과)이며, 번역가, 연극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극단 프랑코포니’(2009년 창단) 대표로서 거의 매년 한 편씩 공연 제작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번역 신인상(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 1991), 한국 문학 번역상(한국문학번역원, 2003)을 공역자 카티 라팽과 공동 수상한 바 있으며, 서울연극인대상 번역상(서울연극협회, 2014)을 수상했다. 그 외 프랑스정부 교육공로훈장(PA)(2015), 올빛상(학술평론부문, 한국여성연극인협회, 2018)을 받았다.
프랑스어 역서(카티 라팽과 공역)로는 윤흥길의 소설 《에미》와 《장마》, 《김광규 시선집》을 비롯해 최인훈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윤대성 희곡 《신화 1900》, 이현화 희곡 《불가불가》, 이윤택 희곡 《문제적 인간−연산》과 《이윤택 희곡집》, 《한국 현대 희곡선》, 《한국 연극의 어제와 오늘》, 《이현화 희곡집》 등의 한국 문학과 한국 희곡, 한국 연극 연구서가 프랑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우리말 역서로는 불어권의 동시대 희곡인 미셸 마르크 부샤르의 《고아 뮤즈들》과 《유리알 눈》, 장뤼크 라가르스의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와 《단지 세상의 끝》, 장 미셸 리브의 《동물 없는 연극》, 조엘 폼므라의 《두 한국의 통일》과 《이 아이》, 레오노르 콩피노의 《벨기에 물고기》, 상드린 로슈의 《아홉 소녀들》, 플로리앙 젤레르의 《아버지》, 마갈리 무젤의 《쉬지 스토르크》, 콤 드 벨시즈의 《너 자신이 되라》, 클로딘 갈레아의 《나는 멀리서 돌아온다》 등이 있다. 그 외 피에르 볼츠의 《희극, 프랑스 희극의 역사》(공역), 장 보델 외 《프랑스 중세 파블리오 선집》(공역), 카티 라팽의 시집 《그건 바람이 아니지》와 《맨살의 시》(공역)가 있다.
차례
한국 독자에게
나오는 사람들
1막 출발
2막 자동차
3막 식사
4막 전날 밤
5막 취리히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뱅상 :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공연하고 있을 때 극장 복도에 있는 나를 얌전히 있게 하려고 엄마는 이걸 찾아왔었어.
엄마는 내가 슈퍼 히어로에 열광하는 걸 이용한 거였어.
엄마는 그걸 우습게 생각했으면서도.
엄마는 이 세상에서 슈퍼 히어로는 만델라, 데레사 수녀, 오드리 햅번 그리고 …엄마라고 했어!
그리고 엄마는 슈퍼맨의 힘을 무력화하는 그 초록색 물질, 크립토나이트의 이야기를 알게 됐지.
그래서 날 얌전히 있게 하려고 어디 먼 산 깊은 곳에서 찾아낸 크립토나이트 한 조각을 보여 주며 날 협박했어.
틀림없이 보잘것없는 조약돌이었지만
나는 믿었어.
믿는 척했어.
엄마가 맞았어. 엄마의 죽음은 크립토나이트보다 더 끔찍해.
난 무력해졌거든.
엄마가 틀렸어.
난 착하게 있지 않을 거야.
진짜 쓰나미가 될 거야.
어디론가 여권 없이 난 떠날 거야.
내게 남은 시간을 위해 나는 배를 탈 거야.
난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어. 그래도 난 갈 거야.
살면서 계속 놀라게 될 그 위험을 만나러 가는 거야.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 평안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존재할 거야.
103-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