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탈리 사로트의 첫 희곡 〈침묵〉은 무명의 인물들과 화제의 중심에 선 장피에르가 대립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극 중 인물들은 침묵을 고수하는 장피에르를 대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원을 하기도 하고 재담도 떨어 보지만 무거운 침묵이 계속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침묵은 불안과 동요를 일으키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장피에르가 침묵하는 이유를 내성적인 성격이나 지적 우월감 같은 심리적·사실적 잣대로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작품의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중요한 것은 침묵이 일으키는 파장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로트는 ‘왜’라고 묻는 대신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느낌에 집중할 것을 제안하며, 침묵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욕망과 질투, 두려움의 감정들을 포착한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도 침묵과 언어가 팽팽하게 대립한다. 형체 없는 여섯 개의 목소리가 침묵이라는 공허를 중심으로 맴도는 원추형 구조를 띠고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의 개별성보다 소리의 질감을 강조하는 사로트의 문학관을 잘 보여 준다. 사로트는 인식 이전의 미세한 심리적 진동인 ‘트로피즘’을 구현하기 위해 시각적 무대 대신 청각 매체인 라디오극을 선택했다. 대화의 표면적 의미가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심신의 미세 변화를 음색, 강약, 속도 그리고 침묵의 무게를 통해 변주해 낸 것이다. 특히 라디오라는 매체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장피에르의 양면성을 상상력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침묵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성경 구절을 인용한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장피에르의 침묵은 구원보다는 부정적인 압박으로 다가오며,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언어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1964년 독일 방송 당시 홀로코스트의 책임 문제와 맞물려 집단 불안을 자극했던 이 작품은, 전쟁과 부조리가 여전히 만연한 21세기 관객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침묵〉은 완강한 침묵이 일으키는 내적 경련을 소리 예술로 실험한 걸작으로, 낭독을 통해 미세한 변화가 만드는 출렁임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특별한 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200자평
나탈리 사로트의 〈침묵〉은 한 인물의 완강한 침묵이 주변에 일으키는 심리적 파장을 그린다. 사로트는 침묵의 이유를 찾기보다 그로 인해 촉발되는 미세한 내면의 진동인 ‘트로피즘’을 소리의 질감으로 형상화한다.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는 침묵의 양면성을 통해 언어의 허망함과 집단적 불안을 조명하며, 시각을 넘어선 청각적 문학 체험의 정수를 선사한다.
지은이
나탈리 사로트
인간 내면의 미세한 심리적 움직임, ‘트로피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프랑스 작가다. 러시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법학, 문학, 사회학 등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39세에 《트로피즘》을 발표했다. 이후 누보 로망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의혹의 시대》, 《황금 열매》 등에서 전통적 서사와 인물 심리를 벗어나 발화 이전의 감각과 침묵 속 긴장을 포착했다. 희곡에서도 말과 침묵 사이의 틈새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불안과 내면의 파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문학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독창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옮긴이
권현정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유럽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프랑스 무대 미술의 형태 미학〉, 〈연출의 탄생〉, 〈메테를랭크의 일상의 비극 : 내부〉, 〈라가르스의 세상의 끝일 뿐 또는 소통의 실패〉, 〈무대 미술의 관례성−맨션에서 임의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Maeterlinck et le théâtre pour marionnettes〉, 〈젤레르의 〈타인〉에 나타난 경계의 모호성〉 등이 있다. 역서로는 1975년부터 2015년까지 무대 미술의 변천과 의미를 다룬 《프랑스 시노그라퍼(Scénographes en France)》(뤼크 부크리스, 마르셀 프레드퐁 외 공저), 《마테를링크의 인형극(Trois petits drames pour marionnettes)》, 《나는 사라진다 / 나의 그 무엇도(Je disparais / Rien de moi)》(아르느 리그르 저), 《시노그라피 소론(Petit traité de scénographie)》(마르셀 프레드퐁 저)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침묵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 1 : 그럼 저는요, 우리 아웅다웅 씨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일화 한 편 얘기해야 하나요? 다 아는 얘기인데… 저는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요, 결코, 정말이에요… 그렇죠. (씁쓸하게) 그럴 상황이 아니죠. 저 친구를 즐겁게 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너그럽게 이해해 줘요. 아니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우리는 모든 것에 준비되어 있는데. 웃음거리가 되고 비굴해지고… 모든 것에… 아웅 씨는, 불쌍한 아웅 씨는 현기증을 일으키고 말았어요… 우리는 기꺼이 지옥에 끌려갈 마음이 있잖아요. 영혼을 팔아넘기겠죠… 제가 그랬듯이… 님이 나의 영혼을 쟁취하길…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