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우리피데스의 사티로스극 〈키클롭스(Cyclops)〉는 고대 그리스 문학 속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제9권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현존하는 유일한 완전한 형태의 사티로스극이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비극 뒤에 상연되던 사티로스극은 술과 쾌락을 즐기는 반인반수 정령 ‘사티로스’가 등장해 음탕하고 천박하며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장르였다.
트로이 전쟁 후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가 부하들과 함께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히는 사건이이 작품 배경이 된다. 폴리페모스는 끼니마다 그들을 잡아먹으며 위협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노바디(Nobody, 아무도 아닌 자)’라 속이고, 마론이 준 달고 독한 포도주로 거인을 취하게 만든 뒤 불에 달군 나무로 그의 눈을 찔러 탈출한다. 이 과정에서 “손님을 환대하라”는 오디세우스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실레노스와 사티로스들이 벌이는 술과 욕망의 소동과 뒤섞이며 익살극적 효과를 낳는다.
〈키클롭스〉에는 폴리페모스와 맞서는 오디세우스, 술에 취해 방탕한 정령 사티로스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양부이자 코로스 단장 실레노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특히 실레노스는 늘 술에 취해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늙은이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디오니소스를 기른 지혜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성은 작품 분위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에우리피데스는 원래 비극의 소재였던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모스의 이야기에 사티로스적 해학을 결합해 영웅 서사의 장중함을 희극적으로 전복한다. 그 결과 관객은 신화적 영웅담과 익살스러운 희극 사이에서 새로운 연극적 경험을 맛보게 된다. 영웅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노바디’로 위장해 승리한다는 설정은, 인간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던지며 단순한 소극 이상의 의미를 품는다.
〈키클롭스〉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소극이 아니라 그리스 연극의 다양성과 디오니소스 축제의 본질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오디세우스의 지략, 사티로스들의 방탕함, 폴리페모스의 야만성은 각각 대비를 이루며 인간성과 신성, 지혜와 욕망을 탐구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극적 상상력의 정수를 전해 준다.
200자평
에우리피데스의 〈키클롭스〉는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각색한 유일한 현존 사티로스극이다. 사티로스와 실레노스가 등장해 술과 향락으로 웃음을 자아내며, 오디세우스의 지략과 신화적 사건을 해학적으로 변주해 인간성과 욕망, 지혜를 풍자한다.
지은이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484?~B.C.406?)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Sophocles)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원전 534년에 그리스에서 최초로 비극이 상연된 후,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그리스 연극은 전성기를 맞는다. 기원전 3세기까지의 그리스 고대극의 전통은 로마를 거쳐 유럽 전체에 퍼지며 서구 연극의 원류가 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과정에서 서구 연극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극작가다.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고, 다만 부유한 지주 계급 출신이라는 점과 좋은 가문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 정도만 전해진다. 기원전 455년에 데뷔한 이후 92편에 이르는 작품을 집필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18편뿐이다. 기원전 408년경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에 머물렀고 2년 뒤에 사망했는데,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바카이>는 이때 집필된 작품이다.
옮긴이
김종환
1986년부터 2023년까지 계명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영미어문학회 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95년에 재남우수논문상(한국영어영문학회)을 받았고, 1998년에는 제1회 셰익스피어학회 우수논문상을, 2006년에는 원암학술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셰익스피어와 타자》, 《셰익스피어와 현대 비평》, 《셰익스피어 연극 사전》(공저)이 있으며, 모두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그 외 저서로 《셰익스피어 작품 각색과 다시쓰기의 정치성》, 《인종 담론과 성 담론》, 《명대사로 읽는 셰익스피어 비극》, 《명대사로 읽는 셰익스피어 희극》, 《셰익스피어 비극의 비평적 해석》, 《음악과 영화가 만난 길에서》, 《상징과 모티프로 읽는 영화》가 있다. 셰익스피어 주요 작품 21편을 번역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의 현존 작품 전체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영역 17편을 번역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중역해 출판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서막
제1삽화
제2삽화
제3삽화
종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실레노스 : 저기, 해변에
그리스 배가 들어오는 게 보여.
노 젓는 사람과 우두머리가
여기 이 동굴로 향하고 있어.
머리에 빈 바구니를 이고 있네.
음식과 물을 찾고 있는 것 같아.
가련하고 불운한 낯선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우리 주인 폴리페모스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요.
그들이 와서 걷는 이 땅이
외국인에게 적대적이라는 것도 몰라.
끔찍하게 운이 없어. 자기들이
식인종 키클롭스의 바로 앞에
왔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기
이 끔찍한 시칠리아의
에트나 바위섬에 오게 됐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