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AI와 가상 정체성, 새로운 인간됨을 묻다
메타버스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주목받는 것은 가상 정체성이다. 버추얼 유튜버, 가상 아이돌, 그리고 AI 버튜버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새로운 문화와 산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2020년대 초반,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비대면 소통의 필요 속에서 메타버스가 각광을 받았으나 일상의 회복과 함께 쇠퇴했다. 그러나 ‘부캐’와 버튜버, 가상 아이돌은 오히려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정체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 책은 신화적 자동인형에서 출발해 버튜버와 AI 가상 인간에 이르는 흐름을 추적하며, 인간은 왜 또 다른 자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소통하는지 탐구한다. AI 버튜버의 등장은 가상 정체성 기반 인공지능의 새로운 학습 모델과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문제와 감정 노동의 부작용도 드러낸다. 이 책은 이를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인간 정체성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로 읽어내며, “AI와 가상 정체성이 인간됨을 어떻게 다시 쓰게 될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200자평
메타버스가 사라진 자리에 가상 정체성이 떠오르고 있다. 버튜버와 가상 아이돌, AI 버튜버는 새로운 문화와 산업을 열며 인간 정체성의 경계를 흔든다. 가상 자아가 기술·사회·윤리의 미래에 던지는 질문을 성찰한다. 인공지능총서. aiseries.oopy.io에서 필요한 인공지능 지식을 찾을 수 있다.
지은이
윤은호
한양대학교 (사)후견신탁연구센터 이사, 인천대학교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박사후연구원. 문화 콘텐츠, 웹 컬처(서브컬처)에서 시작해 기호학, 일본 문화학, 자폐 특성 연구, 장애 연구 등 다학제적 접근성을 가지고 다양한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동 대학원 문화경영학과를 거쳐 2016년에 문화경영학박사 학위를 받고 2019년부터 3년간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에서 초빙 교수로 일했다. 2009∼2011년 전남대학교 HK연구원을 거쳐 2022~2023년 한양대학교 SSK 전임연구원으로 참여했으며 현재도 고려대학교, 숭실대학교 등 여러 대학 연구자와 공동 연구 중이다. 최근 논문으로 “Korean autistic persons facing systemic stigmatization from middle education schools”(2024), “애니메이션과 현실공간의 결합에 대한 연구”(2024), “한일 웹소설 인트로의 비교연구”(2022) 외 다수 SCIE, SCOPUS, KCI급 논문이 있다. 학계 밖에서는 한국경제TV 와우스타, 《철도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차례
메타버스 광풍이 끝나고
01 가상 정체성의 전신들
02 사이버 가수와 챗봇
03 보컬로이드와 MMD
04 BJ와 라이버
05 가상 인간과 버튜버
06 가상화된 인간은 누구인가
07 졸업한 버튜버는 복제돼 돌아올까
08 VR챗이라는 대안
09 가상 인간과 사이버 폭력
10 인권법 관점의 과제
책속으로
그러나 근대의 도래와 함께 출판물, 특히 잡지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며 독립운동 등의 이유로 작자의 신원을 밝히기 곤란한 투고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때 호를 쓰면 신분이 들통 나게 되어 별도의 가명을 쓰는 경우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이름만 밝히거나 자신과 다른 성명을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점차 ‘○○생’, ‘ABC’ 등 이름과 무관한 가명도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군사 정권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많은 시민이 비인권적 탄압에 맞서기 위해 가명을 썼는데, 이 때문에 1990년대의 PC 통신은 실명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결국 텍스트 기반 인터넷이 월드 와이드 웹으로 바뀔 즈음에서야 한국인은 SF 작가 듀나와 만화ᐨ애니 팬덤, 코스어(coser)를 시점으로 마음 놓고 닉과 함께 가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01_“가상 정체성의 전신들” 중에서
2007년 5월에 후지타 사키(藤田咲)의 목소리를 담은 하츠네 미쿠(初音ミク)가 출시된 지 3개월 만에 2만 5천개 이상의 번들이 판매되었으며(剣持秀紀·大下隼人, 2008), 곧바로 번들을 구매한 팬덤 구성원들은 당시 일본에서 젊은 누리꾼들의 관심을 끈 니코니코동화 사이트에 자신들이 하츠네 미쿠를 사용해 만든 작품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하츠네 미쿠를 통해 만든 음악들은 보컬로이드만으로 불려졌다는 의미로 오리지널로 불리게 되었는데, 2007년 9월부터 〈미쿠미쿠하게 해줄게♪〉, 〈멜트〉, 〈꿈꾸는 작은 새〉, 〈사랑은 전쟁〉, 〈블랙 록슈터〉, 〈월드이즈 마인〉 등의 미쿠 오리지널이 니코니코동화에 올라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츠네 미쿠의 성공은 성우 시모다 아사미(下田麻美)의 목소리를 남성과 여성형으로 다듬은 쌍둥이 카가미네 린·렌(鏡音リン·レン)의 개발(2007.12)로 이어졌으며, 린과 렌으로도 다수의 오리지널이 공개되었다. 이후 크립톤 퓨처 미디어는 유명 비주얼 록 가수 각트(GACKT)의 목소리를 담은 ‘가무이 가쿠포(神威がくぽ)’ 등의 후속작을 내며 캐릭터들을 활용한 미디어 믹스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03_“보컬로이드와 MMD” 중에서
그런데 이러한 혼용을 넘어 ‘안의 사람(中の人)’의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는 상황을 버추얼 인터넷 방송에서는 ‘방송 사고’로 여길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빨간 약’으로 부른다.
이와 관련해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은, 한국에서는 ‘빨간 약’ 금기에 대한 준수 의식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챈트 엔터테인먼트 소속 스트리머 견자희는 2024년 버튜버로 전환했으나 동년 11월 진행된 인챈트 운동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타났다. 러끼는 2025년 자신이 신비주의적인 적이 없었다며 유튜브에 자신의 ‘빨간 약’을 공표했다.
또한 스트리머인 장마군은 평소 얼굴을 공개하고 방송하지만 캐릭터를 갖추고 버튜버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홍대에서 버튜버들이 만난 것을 실시간 음성 방송을 하고 나서 유튜브에 공개한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빨간 약에 대한 버튜버 시청자들의 금기 의식은 고전 시대 비의나 기밀에 대한 준수 의식에 못지않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빨간 약에 대한 정보를 알기 원하는 사람도 있다. 버튜버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처럼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과 함께 버튜버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킨다.
-06_“가상화된 인간은 누구인가” 중에서
이미 가상 정체성은 가상 공간과 아바타 수준을 넘어선 개인 정체성의 대안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상 정체성은 이름이 주는 사회적 부담감과 속박,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게 하는 인권적 수단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신생 문화 산업이 된 버튜버 등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 인류에게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 되었다.
더 나아가 가상 정체성이 인권 침해에 대한 방지 역할 또한 수행하고 있는 만큼, 가명을 비롯한 가상 정체성의사용을 사법적, 경찰 행동적 관점에서 범죄나 탈선의 징후로 보지 못하게 하고, 가상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의 연결을 공포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 조항을 신설하거나, 가상 정체성을 보조 신분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한층 진보적인 정책 또한 고려할 때가 되었다.
-09_“가상 인간과 사이버 폭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