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키다 돗포 단편집
2515호 | 2015년 3월 30일 발행
구니키다 돗포, 일본 정신의 근대를 열다.
인현진이 옮긴 구니키다 돗포(国木田独歩)의 ≪구니키다 돗포 단편집≫
오로지 살아라
일본 근대 문학이 그에게서 출발한다.
세계의 리얼리티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것, 사이비 구체성의 포장지,
신화의 세계를 포장한 얇고 질긴 막이 찢어진다.
그다음은?
하늘의 해처럼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다.
“도미오카와 친구로 지내면서 살아 숨 쉬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 깊이 남아 있다. 선혈이 낭자한 주검을 보았고, 그 모습을 머릿속에 새겼다. 한 줌의 재와 백골로 변한 모습 역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화장터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상상해 보았다. 깜깜한 밤중에 수성이 쏟아내는 빛을 받은 한 줄기 푸른 연기가 굴뚝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한동안 너른 하늘을 떠돌다가 차츰 그 형체가 없어지면서 공기 중에 녹아든다. 그런 상상이 내 머릿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듯하다. 어쩌면 내가 도미오카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이러한 형태적 변화가 하나의 고리를 이루며 재현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뇌에서 만들어 내는 환영만 쫓다가 ‘죽음’이라는 본질에 영영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 ≪구니키다 돗포 단편집≫, 구니키다 돗포 지음, 인현진 옮김, 63쪽
친구는 어떻게 죽었는가?
‘나’는 도미오카의 집을 방문한다. 어두컴컴한 방에 친구가 죽어 있었다.
사인은?
자살이다. 이유는 모른다. ‘내’가 보기에 “일개 관청 공무원이던 도미오카 다케지로는 갑자기 미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검을 만난 ‘나’의 행동은 무엇인가?
의사, 경찰과 절차를 밟고 친구들과 도미오카의 어머니에게 소식을 알린다.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다.
깊이 생각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
고리처럼 환영만을 좇는다. 그래서는 ‘죽음’이라는 본질을 알 수 없음을 깨닫는다. ‘죽음’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치 어떤 막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을 받는다. “천지만물과 나 사이에 한 꺼풀의 막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막’은 어떤 경험인가?
주인공은 말한다. “사실(事實)과 우주 만물에 정면으로 부딪쳐 보지 않고서는 ‘신(神)’도, ‘미(美)’도, ‘진실(眞)’도 결국은 환영을 쫓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부딪치면?
그때 경이로움이 발생한다. 그때 불투명한 ‘막’이 찢어진다.
경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이 작품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놀란다’는 것은 바깥을 가린 막을 찢는 것이며 ‘투명’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내면에서 시작해 내면으로 끝나는 ‘심리적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내면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돗포를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 내면의 발견인가?
‘풍경의 발견’도 있다. 고진은 돗포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내면을 전제로 한 ‘풍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선험적인 관념과 개념 하에서 이루어지던 외부 묘사는 돗포에 이르러 고독한 내면과 주관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이른바 내적 전도(轉倒)에 의한 ‘풍경’이 나타났다.
풍경을 발견한 작품은 무엇인가?
<무사시노>와 <소라치 강가>가 있다.
그의 풍경은 그 이전과 무엇이 달랐나?
<무사시노>를 보라. 그는 자신만의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해 무사시노를 파악한다. 한곳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이동하면서 지리적 변화, 현상적 변화를 파악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수동적 자세로 받아들이는 종래의 자세가 아니다. 자신이 직접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본 문단의 평은?
문예평론가 나카지마 겐조는 존재의 자각을 일깨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히라노 겐은 작품을 읽으면 잊고 있었던 원초적인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육욕 소설의 선조’, ‘메이지 시대의 진정한 작가’라는 평도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돗포를 스트린드베리, 니체, 톨스토이 등과 견주었다.
자기 스스로는 뭐라고 했나?
돗포는 돗포(独歩)라고 했다. 자신의 독자적인 문학관으로 작품을 썼다는 말이다. 일기 ≪거짓 없는 기록≫에서는 사랑과 진실과 노동의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고 썼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해돋이>에 ‘해돋이를 보아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이 답이다.
어떤 맥락인가?
한 노인이 젊은이와 마주친다. 절망에 빠져 자살하려는 청년이다. 노인이 말한다. “나는 올해 예순인데, 이렇게 멋진 해돋이는 처음이네. 내년엔 올해보다 더 아름다운 해돋이를 보고 싶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일세.” 그리고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사람은 아침 해가 파도를 뚫고 뛰어오르는 듯이 힘차게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언제나 어둑어둑할 때 일어나서 해돋이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야 한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그날 할 일을 오로지 한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
돗포는 어떻게 살다 갔나?
1871년 태어났다. ‘돗포(独歩)’는 필명으로, 혼자서 걷기를 좋아했던 고독한 성향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70여 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시(詩), 고백론,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유일한 장편소설인 ≪폭풍(暴風)≫을 연재하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08년 짧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
당신은 누구인가?
인현진이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