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1997년에 췌장암으로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작품을 실었다. 전쟁포로 출신인 아버지와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 이야기가 많다.
<용두각을 찾아서>에는 어머니의 음부를 우연히 훔쳐 본 소년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충격적 체험에 의해 순결한 성(性)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존재에게 어머니는 부정적인 여인상으로 각인된다. 그리고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하혈”은 곤고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의 끈질긴 생명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성의 신비스러움과 생산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불모성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가지는 맹목적 동경과 신뢰가 상실된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이 가지는 순수한 동경과 꿈에 대한 원초적 결핍으로 기능한다. 결핍과 그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것이야말로 김소진 소설의 원동력이다.
<쥐잡기>는 아버지께 바치는 제문이다. 전쟁 와중에 월남한 아버지의 곤고한 삶을 아들의 시각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인물이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포로수용소에서 이남과 이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 아버지는 “잔뼈가 굵은 고향이 있고 부모처자가 있는” 북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과 “물밑쪽 같은 신세 이제 고향에 돌아가믄 뭘 하겠나” 하는 체념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그러다 “폭동의 와중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깨우는 바람에 목숨을 건지게 해 준 흰쥐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이남 쪽으로 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고 남쪽을 선택한다.
<고아떤 뺑덕어멈>에서 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아내 최옥분과 닮은, 동네 극단 심청전의 뺑덕어멈으로 나온 여인을 보고 상사병을 앓는다. 일찍이 중풍을 앓아 어머니와 십여 년간 잠자리를 함께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여인의 살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는 뺑덕어멈의 사진에 ‘고아떤 최옥분’이라고까지 적어 놓았다. 아버지는 남한에서의 구차한 삶을 과거(북)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위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유년시절 잃어버린 꿈의 의미를 글쓰기로 위안하며 살아가는 작가의 욕망과 정확히 일치한다.
<개흘레꾼>에는 성의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개들의 흘레에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아들은 앞으로도 개흘레를 계속 붙일 것이냐고 묻는다.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지난 시절 거제도 수용소의 체험을 들려준다. 수용소 내 좌우 대립 항쟁 와중에 아버지는 ‘개를 시켜서 성기를 물어뜯겠다’는 고문 협박을 당한 이야기다. 셰퍼드의 위세 앞에 아버지는 아랫도리에 이상한 통증을 느끼며 혼절한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고 이러한 자책이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그리고 고향을 잊게 하였다는 점을 고백한다. 개흘레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훼손된 성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발원한 셈이다.
<혁명기념일>에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린 프랑스 대혁명 기념식이 소재로 나온다. 혁명 기념 파티에 우연히 참석한 정섭은 1980년대에 함께 운동했던 선배 석주를 만나게 된다. 석주는 독재정권에 빌붙어 정치인으로 전락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아버지를 파국으로 모는 동시에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석주가 지금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외교관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다. 석주는 같이 운동했던 동료의 애인을 가로채서 결혼까지 했다. 즉, 석주는 아버지를 거부했다가 또 다른 아버지인 자본의 논리에 투항한 셈이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는 “황금빛 똥”의 배설이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글쓰기의 거름이 되었던 과거의 꿈과 기억, 그리고 결핍의 체험이 그의 육체에서 소화되어 “황금빛” 희망으로 변주된다. 그는 “천당”과 “지옥”이 뒤엉켜 있는 삶의 현장에서 과거의 체험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지렛대임을, 심리적 결핍을 벌충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문학의 추동력이 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문학 세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인 “황금빛 똥”이 발효되어 우리 문학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기도 전에 그의 글쓰기는 막을 내렸다.
200자평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남한에 정착하게 된 아버지 이야기를 쓴 작가 김소진의 단편 일곱 편을 실었다. 1990년대 작가지만 말맛은 고금을 넘나든다. 다양한 우리말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작가다. 아쉽게도 34세에 요절했다.
지은이
김소진은 1963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인데, 6·25전쟁 와중에 처자식을 북쪽에 남겨 두고 홀로 월남했다. 남쪽에서 새로 꾸린 가족은 1967년 서울로 이사해 미아리 산동네에 자리를 잡는다. 이즈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어머니가 홀로 생계를 맡게 된다. 이러한 아버지, 어머니의 고단한 삶 그리고 미아리 산동네의 척박한 삶의 풍경은 그의 소설의 아련한 밑그림이 된다.
1982년 서라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에 입학한다. 2학년 때 영문과로 진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져 황석영, 이문구, 박완서 등의 작품을 주로 읽으면서 습작 텍스트로 삼았다.
대학 졸업 후 1990년 ≪한겨레신문≫에 취직,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쥐잡기>로 당선, 1997년 타계할 때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소설집으로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 ≪고아떤 뺑덕어멈≫(1995), ≪자전거 도둑≫(1996),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1997) 등이 있고,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1995), ≪양파≫(1996) 등을 펴냈다. 1996년 ‘제4회 오늘의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엮은이
고인환은 1969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예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했다. 2006년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제7회 젊은평론가상을 받았다. 저서로 ≪결핍, 글쓰기의 기원≫(2003),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지성 연구≫(2003),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2005), ≪공감과 곤혹 사이≫(2007), ≪한국문학 속의 명장면 50선≫(2008),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2009), ≪작품으로 읽는 북한문학의 변화와 전망≫(공저, 2007)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재미있고 알찬 글을 읽고 쓰기 위해 학생들과 고민하는 한편, 한국작가회의 산하 민족문학연구소에서 민족문학, 비서구 문학, 동시대 한국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차례
용두각을 찾아서
쥐잡기
고아떤 뺑덕어멈
개흘레꾼
혁명기념일
자전거 도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국민학교 삼학년 여름이었을 게다. 나는 좁디좁은 부엌 바닥에 돗자릴 깔고 서늘하게 배를 대고 누운 채 산수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저녁 끼니때가 돼 오자 어머니는 방에 있는 쌀자루에서 쌀을 몇 주먹 꺼내 안치느라 나의 이마빡으로 치맛자락을 차란차란 스치며 오갔다. 나는 마침 숙제도 다 돼 가는지라 공책을 덮고 굳은 어깻죽지를 펴느라 등을 대고 돌아누웠다. 그때 또 어머니가 지나갔다. 치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때 단 한 벌 뿐인 광목 팬티를 빨아 너느라 어머니는 홑치마 바람이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비릿한 내음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