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소진 단편집
고인환이 엮은 ≪초판본 김소진 단편집≫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전쟁이 나고 징집되고 싸움터에 던져졌다 포로가 된다. 선택의 순간이 온다. 북이냐, 남이냐, 제삼국이냐? 그는 남을 선택했다. 수용소 쥐 한 마리를 따라간 결과다. 역사는 헛되고 헛되도다.
나는 좁디좁은 부엌 바닥에 돗자릴 깔고 서늘하게 배를 대고 누운 채 산수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저녁 끼니때가 돼 오자 어머니는 방에 있는 쌀자루에서 쌀을 몇 주먹 꺼내 안치느라 나의 이마빡으로 치맛자락을 차란차란 스치며 오갔다. 나는 마침 숙제도 다 돼 가는지라 공책을 덮고 굳은 어깻죽지를 펴느라 등을 대고 돌아누웠다. 그때 또 어머니가 지나갔다. 치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때 단 한 벌 뿐인 광목 팬티를 빨아 너느라 어머니는 홑치마 바람이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비릿한 내음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용두각을 찾아서>, ≪초판본 김소진 단편집≫, 김소진 지음, 고인환 엮음, 28~29쪽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아름다운 꿈을 동경한다. 꿈과 동경이 파괴되면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스쳐 간 사건이 존재의 내면을 지배하며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주인공에게 이 사건은 상처와 같다. 순결한 성(性)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 그에게 어머니는 부정적인 여인상으로 각인된다.
봤으면서 ‘보지 못했다’고 되뇌는 이유는 무엇인가?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반응이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에 대한 동경이 결핍 상태에 빠졌다. 결핍과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것이 김소진 소설의 원동력이다.
데뷔작 <쥐잡기>의 주제는 그의 아버지가 겪는 결핍 현상인가?
아버지는 전쟁 포로로 대한민국 정착을 선택한다. 고향, 경제력, 권위, 이데올로기, 건강이 모자라거나 잃은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특수한 시대 현실과 만난다.
그가 남쪽을 선택한 이유가 ‘쥐가 가는 대로’ 따라간 결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함경도에서 인민군에 징집될 때부터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데올로기를 “헷것”이라 말한다. 포로수용소에서 쥐 덕분에 목숨을 구한 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쥐를 따라 미래를 결정한다.
김소진에게 “헷것”이란 무엇인가?
그는 “헷것”을 문학이 추구하는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소설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헷것”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이 가진 “헷것”의 상상력으로 이데올로기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김소진의 글쓰기 전략이다.
아버지의 의식은 고향을 어떻게 처리한 것인가?
<고아떤 뺑덕어멈>에서 해석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북에 두고 온 아내 최옥분과 닮은, 동네 극단 심청전의 뺑덕어멈을 보고 상사병을 앓는다. 중풍으로 어머니와 십여 년간 잠자리를 함께 못한 아버지가 여인의 살품을 그리워한다.
<개흘레꾼>에서 아버지가 개들의 흘레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거제도 수용소 시절 체험을 들려준다. 수용소에서 린치를 당하면서 개를 시켜 성기를 물어뜯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 뒤 아버지는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개 흘레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훼손된 성에 대한 보상 심리다.
김소진의 ‘운동권 후일담’은 어떤 이야기로 나타나는가?
<혁명기념일>이 그런 내용이다. 정섭은 프랑스 혁명 기념 파티에서 함께 운동했던 선배 석주를 만난다. 석주가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독재정권에 빌붙어 정치인으로 전락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아버지를 파국으로 몰고 독재에 저항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기득권층으로 들어간다. 외교관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린다. 아버지를 거부했으나 또 다른 아버지인 자본의 논리에 투항한 셈이다.
이 작품에서 소시민으로 전락하는 인물 진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즘은 모든 종류의 권위에 반대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진기는 애초부터 아버지라는 상징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석주는 운동권과 결별하며 공무원이 되어 권위를 얻은 반면 진기는 기가 센 아내의 품에 파묻혀 소박하게 지낸다.
정섭이 진기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아버지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정섭은 진기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왕년에 유명했던 아나키스트가 생활 속에 빠져 있는 모습을 무능하다고 본 것이다. 정섭은 “정말이지 저도 누군가를 절실하게 닮고 싶습니다. 무능했던 우리 아버지는 빼고요”라고 말한다.
김소진에게 1980년대란 어떤 시간인가?
대학생 시절이다.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져 황석영, 이문구, 박완서의 작품을 읽으면서 습작 텍스트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1980년대 문학과 성급한 단절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1990년대 소설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른 독특한 세계를 지녔다.
≪초판본 김소진 단편집≫에는 어떤 작품을 실었나?
<용두각을 찾아서>, <쥐잡기>, <고아떤 뺑덕어멈>, <개흘레꾼>, <혁명기념일>, <자전거 도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이렇게 일곱 편을 골랐다.
김소진은 어떻게 문단에 나왔는가?
김소진은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쥐잡기>가 당선돼 데뷔했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21세기문학≫ 1997년 봄호에 발표됐다. 그해 4월에 암으로 사망했다.
1990년대 작가라면 작품 양식은 어떤가?
주요 소재는 전쟁 포로 출신 아버지와 억척 어멈인 어머니 이야기다. 순우리말 사용이 자유자재다. 작품에 쓰인 순우리말 단어만 모아 놓고 보면 1990년대 작가 같지 않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나는 작품은 일산 신도시가 등장하는 <자전거 도둑> 정도다.
김소진 소설이 여느 1990년대 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소설의 이야기성이 많이 약화되었다. 김소진은 이야기성을 충실히 추구했다. 1990년대 소설들이 과거 운동권 이야기를 절망과 좌절 비슷하게 다룬 것과 달리 그는 그런 감정을 바람직하게 극복하려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고인환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