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0명의 동화작가와 시공을 초월해 명작으로 살아남을 그들의 대표작 선집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공동 기획으로 7인의 기획위원이 작가를 선정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고르고 자기소개를 썼다. 평론가의 수준 높은 작품 해설이 수록됐다. 깊은 시선으로 그려진 작가 초상화가 곁들여졌다. 삽화를 없애고 텍스트만 제시, 전 연령층이 즐기는 동심의 문학이라는 동화의 본질을 추구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편저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 소개와 해설을 집필했으며,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다.
시인이기도 한 김요섭은 동화를 쓰면서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동화를 쓴 작가다. 비옥한 예술성의 토양 위에서 동화나무를 키우고자 자연 속의 숱한 오브제를 상상력의 플라스크 안에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거기서 인간 심성의 원형을 파악하고 보편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을 내놓는다. 그것들은 어느 한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그가 남긴 열여섯 권의 시집과 20여 권의 동화집, 그리고 번역서, 평론집, 자전적 이야기 속에 일관하여 흐르는 근원적 정서로 반응하고 있다.
특히 그의 단편 판타지 동화들은 미적 감응을 유발하는 서정적 묘사로 몇 번을 읽어도 감동이 너울진다. 또한 장편동화, 소년소설에서도 설화적 전개의 틀을 벗어나 현대 동화의 전범을 보여 주기도 했다.
김요섭이 일생 동안 시작(詩作)을 하고 동화를 쓰면서 한결같이 화두로 삼은 단어가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고향이다. 잃어버린 고향은 곧 잃어버린 자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고향은 단지 유년의 고향만이 아니라 인류가 떠나온 보다 근원적인 고향, 즉 우주 저편의 신화적 공간까지 확대된다.
먼저 작가는 전쟁과 식민지 치하에서 아름다운 국어가 봄풀처럼 피어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두 발에 꼭꼭 밟히는, 푸른 흙이 사라진 어두운 고향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을 위해 요섭은 다양한 비유나 은유의 의미재를 동원한다. 이를테면 그가 고향을 떠날 때 그를 따라온 북국의 눈과 바람과 별, 별마다 주저리주저리 열리던 민담과 전설, 해와 달, 풀꽃과 나무와 새들로 그만의 독특한 판타지의 집을 지어 낸다.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나왔지만 그의 영혼은 “눈에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눈송이를 뭉쳐 먹으며” “눈보라의 백마를 타고” “고대의 햇빛이 벽난로에서 잔치를 벌이는” 고향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의 별은 가까운 곳에 잡아 두고 탐색하는 별이 아니라 광야의 겨울 나뭇가지에 걸어 둔 등불처럼 바라봄의 별이다. 그렇다고 그의 별이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우주 속 작은 이슬방울 같은 지구지만 열무김치가 익어 가고 빼앗긴 들에도 봄을 키우는 조선의 농민이 버티고 선 거치른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바로 그 현장에 아이들이 생명을 환호하며 북을 치기도 한다.
별과 함께 바람 또한 요섭 문학 속 은유의 의미재로 자주 등장한다.
갖가지 모양과 세기의 바람이 활시위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소리친다. 바람은 피난지의 나뭇가지에 걸어 둔 칠판을 퉁탕퉁탕 치며 희망의 날들을 깨우친다.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전쟁의 상흔을 상기시키며 평화를 꿈꾸게 한다. 그런가 하면 바람에 색을 입혀 노랑 바람은 나비를 춤추게 하고 파랑 바람은 새를 부르고 분홍 바람은 꽃을 피운다.
김요섭은 하나의 모티프로 시의 꽃을 피우고 동화의 싹을 틔우는 묘기를 보이고 있다. 사실 김요섭은 그의 문학 인생을 동화에서부터 시작한 작가다. 그는 동화를 쓸 때 한 번도 나이를 겨냥해 쓴 적이 없다고 어느 책의 머리말에 쓰고 있다. 창작동화의 문학적 수용이 명료하지 않았던 때, 그의 동화의 미적 감응은 가히 독보적이었고 퓨전적이었다. 동화에서 출발한 그의 문학적 행보는 강렬한 사회성과 부드러운 서정을 묶어서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동화적 발상과 시적 이미지가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돼 짜인 것을 발견한다. 교차된 이미지의 그물망에 김요섭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묘사하고 철학적 사유와 유년의 순수를 색칠해 두고 있다. 그로 해서 그의 작품을 읽은 어린이는 작가가 구축한 판타지의 성안에서 색색의 이미지로 마음을 치장할 수 있고 어른들은 강파르고 메마른 영혼에 유년의 풍요로운 감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200자평
시인이기도 한 김요섭은 서정적 묘사가 특징적인 단편동화와, 현대 동화의 전범을 보여 준 장편동화를 썼다. 그는 어두운 고향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나 은유의 의미재를 동원한다. 이 책에는 <샛별과 어머니> 외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지은이
김요섭은 1927년 함경남도 나남에서 태어났다.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고개 너머 선생>이 입선돼 등단했다. 1947년 ≪소학생≫지에 시베리아 벌목노동자로 떠나는 이야기 <연>을 발표하고 1949년에는 현대적 서사 구조 안에 ‘환상’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내장한 작품 <늙은 나무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5년 해방 무렵 월남해서 ≪소학생≫ 등 잡지에 작품(주로 동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1967년 한국시인협회 한국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월간문학≫ 편집위원 등 복수의 직책을 맡아 왕성한 문단 활동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지평을 넓혀 간다.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97년 타계했다.
엮은이
김은숙은 1947년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69년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0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다. 1984년에는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원 국문과 석사를 졸업했다. 1972년에는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 부문에서 우수상을, 1998년에 소천문학상을, 2000년에 방정환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꽈리불≫, ≪뽕뽕돌과 성게≫, ≪엄마의 일기≫, ≪초대받은 꽃반디≫ 등 다수가 있다. 2004년부터 김요섭이 창간한 ≪아동문학사상≫을 복간해 연간 무크지로 발행하고 있다.
차례
샛별과 어머니
늙은 나무의 노래
푸른 연
은하수
꽃주막
사랑의 나무
꽃잎을 먹는 기관차
단추
안개와 가스등
푸른 머리의 사나이
해돋이
해님
해시계
해설
김요섭은
김은숙은
책속으로
1.
이 세계에는 해님이 꼭 하나밖에 없다고들 모두 알고 있읍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새해가 어느 먼 나라에서 떠올라 일 년 동안 지구를 도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아니면 하루에 한 번씩 해님이 돋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해님은 하나가 아닙니다. 밤하늘의 별 수보다 더 많은 해가 이 세계에는 살고 있읍니다.
본래 해님 나라가 따로 있읍니다. 어린이들은 해님 나라 나무에 열렸던 과일이었읍니다.
해님 나라의 뜰은 아주 넓습니다. 그 넓은 뜰에 해님이 과일처럼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읍니다.
해님 나라의 뜰에는 작업복을 입은 해님 나라 나무를 키우는 동산지기가 다닙니다.
해님 나라 동산지기의 음성은 마치 우뢰 소리와 같이 쩌렁쩌렁 우렁찹니다. 그의 이마와 등은 늘 땀에 젖어 번쩍거립니다.
동산지기는 나무 밑을 지나다가, 갓 익은 어린 해님의 얼굴을 톡톡 손가락으로 퉁겨 봅니다. 그때마다 나무에 열린 어린 해님한테서는 향내가 토해집니다.
“어, 이거 무슨 향기일까, 오라 알았어. 열무김치 냄새에 꽃분이 냄새가 나는군.”
해님 나라 동산지기는 그 해님을 뚝 따서는 배구할 때 볼을 던지듯 울타리 너머로 휘잉 내던졌읍니다.
열무김치 냄새와 꽃분 냄새가 나던 해님은 그만 하늘에서 떨어졌읍니다.
열무김치가 맛이 들 무렵 한국의 어느 시골집의 아기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중략)
일 년에 한 번씩 설날에 새해가 돋는 나라는 게으름장이와 느림보 어른들의 나라의 얘기입니다. 날마다, 아니 시간마다, 아니 일 초 동안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새 해님이 태어나는 나라가 우리 어린이들의 나라입니다. 어린이들은 하늘의 해님도 자기 소꿉동무만큼 정답습니다. 하늘의 해님이 보이지 않으면 얼른 이렇게 부릅니다.
해야 해야 붉은 해야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장구 치고 나오너라.
하늘의 해님이 나오면 모두들 물어봅시다. 전에 이 땅에 오기 전 해님 나라 나무에 열렸을 때, 내 이름은 무엇이었냐고요.
내 과일에서는 무슨 향기가 토해졌느냐고! 가만히 물어봅시다.
아마 한국의 어린이들은 아침의 향기가 토해졌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살짝 퉁겨 보셔요. 틀림없이 음악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해님> 중에서
2.
화차에 꽉꽉 꽃짐이 다 실어지면 금테 모자를 쓴 역장님이 천천히 기관차를 향해서 꽃을 흔들어 댔읍니다.
이 신호를 받자 기관사는 하늘에다 멋들어진 파이프오르간 소리 같은 기적을 울리면, 기관차 연통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꽃잎의 모양일 때도 있고, 기관사가 문 파이프의 모양일 때도 있는가 하면 언젠가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사자의 모양일 때도 있읍니다. 때로는 기관사가 존경하는 위대한 사상가의 얼굴 모습일 때도 있읍니다.
(중략)
기관차의 굴뚝에서는 쟈스민의 향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향기가 연기 대신 푹푹거리고 토해졌읍니다.
그 까닭은 이 기관차가 끌고 가는 화물이 꽃짐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기도 하지만 화부가 퍼부어 넣고 있는 것은 석탄이 아닙니다. 꽃다발이든가 꽃나무 뿌리가 화덕에서 타올랐읍니다.
기적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퍼졌읍니다. 그 소리는 구름 떼 같은 종달새들의 울음소리였읍니다.
이윽고 기관차는 장미 꽃잎을 함빡 뒤집어쓴 채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국경 지대를 넘어섰읍니다. 장미로 우거진 국경 지대를 다 넘어섰을 때는 화물 열차의 무쇠 바퀴마다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꽃향기가 마구 뿜어졌읍니다.
-<꽃잎을 먹는 기관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