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김유정 소설에 대한 연구 경향은 다음의 몇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문체, 인물 묘사에 나타난 해학성과 골계미를 통해 전통적 미학을 찾는 연구와 향토성과 해학성 등의 전통 미학의 배면을 이루는 농촌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형상화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또 소재, 문체, 방언, 어휘 등에 드러나는 토속성과 전통성, 바보 인물형의 의미에 대한 연구가 있으며, 최근에는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자각과 이와 관련한 매춘 제재의 의미 분석이 행해지는데 이는 김유정 소설이 최신의 연구 방향과도 유연하게 결합되어 원론적 제재로서 활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연구 경향은 김유정 소설이 가진 포용성과 유연함에 대한 증명이며 김유정 문학의 미래적 가치에 기인한다.
1931년 김유정은 낙향하여 고향인 실레마을에서 농촌 교육 사업을 펼친 바 있다. 이때부터 김유정의 습작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농촌 경험이 김유정 소설의 주된 소재가 된 것은 물론이고 농촌을 바라보는 작가 의식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김유정이 목도한 농촌의 현실이란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두려움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극도의 가난과 그로 인해 피폐해지는 인성, 기본적 생계도 보장되지 않고 소작농의 관성적 노동으로 구축되는 농경 사회와 같은 조건에서 옳고 바른 인간과 아름다운 자연이란 불가능한 소망일 수 있다. 농경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편에 불과했고, 농민들은 더 이상 정착민도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도 아니었다. 김유정이 목격한 농촌과 농민은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밧>, <떡>과 같은 비극적 소설로 재현되었고, 참담한 운명과 비극적 결말은 김유정 소설의 일반적 특징이 되었다. <봄·봄>, <동백꽃>에 드러난 해학성과 골계미는 김유정 소설에서 이례적으로 두드러지는 몇몇 작품의 특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유정이 토속어를 활용하여 생동감 있는 표현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나 김유정의 대표작인 <봄·봄>, <동백꽃>에서 보이는 즐거운 해학과 아름다운 자연은 몇몇 작품에 국한되는 것은 물론이며 그마저도 매우 애상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만큼 김유정 눈에 비친 농촌 현실은 어둡고 암담한 것이었다.
인간성의 파괴와 회복
김유정 소설에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불가능한 소망의 관계를 통해 김유정 소설의 비극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는 가난과 제도의 견고한 벽 앞에서 무시되던 인간성과 도덕성이 회복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불가능한 소망을 가능하게 만들고 무너진 인간성을 다시 세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이고 신뢰다.
<소낙비>의 춘호는 노름판에 가서 돈을 따 아내와 ‘후한 인심’의 서울로 이사 가서 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의 소망이다. 건너편 금맥이 우리 콩밭으로 이어져 있어 밭에서 콩 대신 금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열흘 만에 소 반 필 값이 생기고 명태를 먹어보는 일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아내가 몸 판 돈 이 원을 가지고 노름판에 가서 큰돈을 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 이사 간 서울이 ‘후한 인심’인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불가능한 소망에 들떠 불쌍한 아내를 때리고 콩밭에서 콩 대신 금을 따려 하고 생명의 은인을 배반하고 있다. 여기에 김유정 소설의 비극성이 배가된다. 극한의 가난 앞에 파탄에 이르는 인간성의 문제가 사실은 불가능한 소망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키운 벼를 정당하게 베어내지 못하고 몰래 도둑질해야하는 소작농의 비애를 그린 <만무방>에도 불가능한 소망이 나타난다.
<봄·봄>에서 점순이의 키가 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는 전제 조건일 뿐이다. 점순이가 크지 않더라도 점순이와 결혼한다면 이는 소망을 이룬 것이고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장인을 고마워하는 마음과 사위로 맞으려는 마음이 인간적 신뢰로 만나 소망을 이룬 것이다. <동백꽃>에는 제도적으로 결정된 수직적 관계가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무화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또한 제도나 사회적 구조로서 불가능한 일들이 인간의 마음과 신뢰로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200자평
해학성과 골계미 속에서 농촌 현실을 형상화했다. 그러나 웃음의 이면에는 어둡고 암담한 모습이 있었다. 김유정 소설에 드러난 자연과 인간, 그리고 불가능한 소망의 관계를 통해 김유정 소설의 비극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지은이
김유정은 1908년 음력 1월 아버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유정의 집안은 유복했지만 김유정이 7세 되던 1915년 어머니 심씨가 작고했으며 두 해 뒤인 1917년 아버지도 작고한다. 부모의 작고 이후 유정은 형 유근의 보호 아래 살아가게 된다. 12세 되던 1920년 유정은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5세 되던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어 형을 따라 관철동,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지로 집을 줄여 이사를 다니는 한편, 유정은 말더듬 교정소에서 치료를 받고 학업에도 문제가 있어 4학년 진급에 실패하는 등 그의 학창 시절은 평탄치 못했다.
유정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어둡게 지배했던 형 유근이 가산을 탕진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한 것이 1928년으로 유정이 20세 되던 해였다. 유정은 이제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나 빈곤한 생활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삼촌 댁에 얹혀 지내며 휘문고보를 다녔고 1929년에 졸업한 후 유정은 둘째 누이 유형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되었다.
열렬히 구애했던 박녹주에게 거절당한 뒤 유정은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했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실레마을에서 야학을 열어 농우회(農友會)로 발전시키고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간이학교 인가를 받는 등 농촌 교육 사업에 열성을 보였다. 이때의 농촌 체험은 토속성 짙은 김유정 소설의 소재적·주제적 근간이 되었다.
김유정은 1933년 상경하여 누이 유형과 함께 지냈으며 이때부터 그는 폐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마와 싸워야 했다. 1933년 3월에 <산골 나그네>를 <제일선>에, 같은 해 9월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신여성>에 발표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1935년 27세 되던 해에 김유정은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노다지>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이후 <금 따는 콩밧>, <떡>, <산골>, <만무방>, <솟>, <봄·봄>, <안해>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창작 활동과 문단 활동을 본격화했다.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춘천 실레마을 시절 탈고한 소설 <심청>을 비롯하여,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음악회>, <동백꽃>, <야앵(夜櫻)>, <옥토끼>, <생의 반려>, <정조(貞操)>, <슬픈 이야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농촌 배경의 소설 말고도 서울 빈민들의 삶과 당시 세태에 대한 소설은 물론 자전적 소설까지 다양한 작품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의 열기와 함께 병세도 악화되었고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병세는 여전했다. <따라지>, <땡볕>, <연기> 등은 서울에 상경하여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의 비극적 삶을 보여주는 한편, 도시 빈민의 군상 중에 자신의 모습도 투영시킨 소설이다. 1937년 3월 절친한 친구 안회남에게 편지를 남기고, 당시 몇몇 젊은 문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유정은 타계했다. 이듬해 그의 단편집 ≪동백꽃≫이 삼문사에서 발간되었고, <두포전>, <형(兄)> 등의 소설이 사후에 발표됐다. <봄·봄>, <땡볕> 등이 영화화됐고 1968년 김유정 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엮은이
이상숙은 1969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정현종론>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2005년 제6회 젊은 비평가 상을 수상. 2006∼2007년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고려대학교·서울산업대학교·한경대학교에서 강사로 있었다. 현재 경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평론집 ≪시인의 동경과 모국어≫, 논문 <북한 문학의 민족적 특성론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차례
소낙비
금(金) 따는 콩밧
노다지
만무방
봄·봄
동백꽃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내 걸 내가 먹는다―그야 이를 말이랴, 허나 내 걸 내가 훔처야 할 그 운명도 얄굿거니와 형을 배반하고 이 즛을 버린 아우도 아우이렷다. 에-이 고현 놈, 할 제 보를 적시는 것은 눈물이다. 그는 주먹으로 눈을 쓱 부비고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잇스니 두레두레한 황소의 눈깔. 시오 리를 남쪽 산속으로 들어가면 어느 집 박갓 뜰에 밤마다 늘 매여 잇는 투실투실한 그 황소. 아무러케 따지던 칠십 원은 갈 데 업스리라.
-<만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