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일본 운문 문학의 혁신을 가져온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의 수필을 뽑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시키는 회화의 ‘사생(寫生)’ 기법을 문학에도 적용해, 일본 전통 시가의 주제를 관념의 장(場)에서 생활과 풍경의 장으로 옮겨, 근대 시가(近代詩歌)라고도 할 수 있는 하이쿠와 단카를 탄생시킨 사람이다.
22세 때부터 폐를 앓아 객혈을 시작한 시키는 30세에 지은 한시(漢詩)에서 “무사 집에 태어나 가문도 일으키지 못했고, 장가도 못 가 가계(家系)도 잇지 못했다. 어찌 조상을 볼 수 있을까? 다만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일본 문학사에 마사오카(正岡)라는 성(姓)씨가 기록되어 오래 남도록 하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시키는 그 자신의 다짐처럼, 생전에 하이쿠 혁신과 단카 활성화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와 하이카이(俳諧) 및 그 작가들에 대해 면밀하게 연구하고 비평하는 학자인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시가를 짓는 시인이기도 했던 시키는 또한 수필을 남겨 우리에게 삶에 대한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마쓰야마(松山)에서 태어난 시키는 16세에 도쿄로 유학을 와서 그 이듬해인 1884년 2월 13일부터 수필 <붓 가는 대로>를 쓰기 시작한다. <붓 가는 대로>는 1892년까지 계속했으며, 그 후 1896년 4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는 4대 수필 중 하나인 <송라옥액(松蘿玉液)>을 신문 ≪일본(日本)≫에 연재한다. 그 내용은 문명론부터 친구에 대한 평론, 회상이나 일상의 견문, 자녀 교육, 야구 해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척추 카리에스로 이승을 떠나기 2년 전, 더욱 병세가 악화해 가는 고통 속에서도 1901년 1월부터 7월에 걸쳐 수필 <묵즙일적(墨汁一滴)>을 ≪일본≫에 연재하며 9월부터는 병상일지나 다름없는 <앙와만록(仰臥漫錄)>을 쓰기 시작하고, 1902년 마지막 해에도 5월부터 9월까지 <병상육척(病牀六尺)>을 연재한다. 만년의 작품인 이 3대 수필에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가 자신의 죽음마저 객관화해 보여 주는 갖가지 내용들이 표출되어 있다.
바깥세상과 본의 아니게 떨어져 지내게 된 시키가 “1년 내내, 그것도 6년 동안 세상 돌아가는 일도 모르고 누워 지낸 병자”인 자신을 자각하면서 쓴 이 수필들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병상 6척, 이것이 나의 세계다. 그럼에도 이 여섯 자의 병상이 나에게는 너무 넓다…”고 기술하는 시키의 <병상육척>의 세계를 함께 읽어 가는 것은 젊은이는 물론, 누구에게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그 작은 공간이 매우 밝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독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의 객관적 사고방식은 흐트러짐 없이 미(美)적 세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유리 항아리에 담긴 금붕어를 보며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예쁜 것도 예쁜 것이다”라고 즐기며 기뻐하는 모습이라든가, “깨달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태연히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으로, 깨달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태연히 사는 것이었다”는 단상, 또는 태연히 산다 해도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살아 있는 가치가 없다”는 등의 어록(語錄)은 성자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특히 1901년부터 1902년에 걸쳐 쓴 세 수필에는 병고에서 해방되고 싶은 소박한 소망에서부터 하이쿠, 단카, 문학과 미술에 관한 비평, 물감으로 그린 정물화, 위문품의 일람표, 식사 메뉴, 조선 옷 입은 소녀의 그림, 세계의 문명론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것들이 실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병상육척>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열려 있는 소우주나 다름없다. 늘 죽음을 느껴야 하는 인간이 갖는 분노, 절망, 자기 연민에서부터 죽기 닷새 전에도 낫토 파는 장사꾼까지 배려한 따뜻한 마음이 함께 녹아 있는 살아 있는 문학이다.
여기서는 시키가 남긴 수필집과 또 때때로 잡지에 실은 수필 중에서 시키의 생활이나 정신적인 내면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문장을 골라 주로 연대순으로 엮었다.
200자평
하이쿠(俳句)와 단카(短歌)를 정립해 일본 근대 문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마사오카 시키. 그러나 그의 삶은 짧고도 가혹했다. 29세부터 병상에서만 지냈고 모르핀 없이는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렸다. 결국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병상에서 쓴 수필에는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가득하다. 고통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고, 죽음 앞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인간 시키의 진솔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은이
마사오카 시키는 1867년 음력 9월 17일 마쓰야마(松山)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네노리(常規)였으며, 술을 많이 마셨던 아버지를 다섯 살 되던 해 여의고 세 살 아래인 여동생 리쓰(律)와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헤이지 모노가타리(平治物語)≫, ≪삼국지≫ 등 전쟁 소설 읽기를 좋아하던 시키는 사춘기에 들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유 민권 운동에 귀를 기울이며, 15세 때는 교내뿐만 아니라 청년 연설회에서 ‘자유’에 대해 연설하기도 한다. 정치열에 들떠 공부도 등한히 하게 된 시키는 정치가가 되려는 야심에 도쿄의 외무성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그 허락으로 16세에는 꿈에 그리던 도쿄로 올라온다. 그 이듬해 1884년부터 옛 번주(藩主)의 육영 단체인 도키와카이(常盤會)의 급비생이 되어 공부하면서 도쿄대학 예비문에 합격, 이해에 수필 <붓 가는 대로>를 쓰기 시작한다. 도쿄대학 예비문은 2년 후 1886년에 제일고등중학교로 재편되었는데 이곳에서 시키는 동갑내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만난다. 1889년 2월, 시키가 각종 문예 형식으로 집필한 7편을 ≪칠초집(七草集)≫ 한 권으로 묶어 비평을 부탁했을 때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는 크게 칭찬하며 ‘소세키(漱石)’라는 필명으로 서명했고, 마사오카 쓰네노리(正岡常規)는 9월에 소세키의 기행·한시문집 ≪목설록(木屑錄)≫을 비평해 주었을 때 ‘시키(子規)’라는 필명을 쓴다. 시키는 이해 5월에 일주일 정도 객혈을 계속한 후, 이제부터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를 필명으로 하자고 결심하며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듬해 9월 시키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소세키는 같은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시키는 다시 철학과에서 국문과로 전과해 하이카이(俳諧) 분류에 착수한다. 1892년 25세 되던 해 11월, 어머니와 여동생을 도쿄로 불러 함께 지내며 12월 1일부터 일본신문사에 입사해 하이쿠 시평(俳句時評)을 담당한다. 대학은 그 이듬해 3월 정식으로 그만둔다. 시키의 네기시 전셋집은 ‘시키암(子規庵)’ ‘네기시암(根岸庵)’이라 불리며 하이쿠와 단카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예를 담론하던 ‘문학 살롱’ 구실을 했다. 시키는 ≪일본≫이 폐간되고 발간한 ≪소일본(小日本)≫의 삽화가로 일하게 된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와 만나 자연의 실경(實景)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예술적 지향이 된 ‘사생(寫生)’에 눈을 뜨게 된다. 27세 가을 무렵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유능한 신문기자는 모두 종군 기사를 써서 인기를 떨치고 있을 때 시키도 간절히 원했던 종군이 허락되어 1895년 3월 중국으로 떠나 요동반도의 서쪽 금주(金州)·여순(旅順) 등에서 1개월 정도 머문다. 그때 육군 군의 부장으로 종군하고 있던 모리 오가이(森鷗外)를 매일같이 방문하기도 한다. 전쟁은 곧 끝나고 5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지병인 폐결핵이 재발해 고베(神戶)에 도착하자 병원에 입원한다. 8월 고향 마쓰야마에 돌아가 마쓰야마중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의 하숙에서 동거하다가 11월에 도쿄로 돌아온다. 1896년 29세부터는 결핵균이 척추로 옮아가 보행이 불편해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지내게 된다. 하이쿠 혁신이 문단에서도 인정받아 이해 1월 3일, 시키암(子規庵)에서 열린 하이쿠 짓기 모임에는 오가이와 소세키도 교시(虛子), 헤키고토(碧梧桐) 등과 함께 참석한다. 4월부터 12월에 걸쳐 수필 <송라옥액(松蘿玉液)>을 신문 ≪일본(日本)≫에 연재한다. 병세가 악화하는데도 시키는 해를 거듭하며 <하이진 부손(俳人蕪村)>을 비롯해 <가인에게 보내는 글(歌よみに與ふる書)>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단카 혁신에도 힘을 쏟는다. 1898년 3월에는 최초의 단카 모임인 가회(歌會)를 시키암에서 개최했으며,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를 도쿄에서 발간, 시키의 주재(主宰)로 교시가 편집을 담당하도록 한다. 이해까지는 인력거를 타고 수차례 외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누워 지내는 나날 속에 1899년 3월에는 ‘네기시 단카회’가 정식으로 발족한다. 이해 가을부터 시키는 나카무라 후세쓰가 쓰던 그림물감을 건네받고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시키는 자신의 생존 기간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1901년 1월부터 7월에 걸쳐서는 <묵즙일적(墨汁一滴)>을 연재하고 9월부터는 병상 일지와 다름없는 <앙와만록>을 쓰기 시작한다. 1902년 1월부터는 병세가 더욱 급격히 악화해 문하생들이 교대로 간호하며, 원고는 구술로 집필된다. 5월 5일 <병상육척(病牀六尺)>을 연재하기 시작해 9월 17일 127회로 이승을 마감하기 이틀 전까지 계속한다. 그사이 6월 27일부터 8월 6일에 걸쳐서는 갖가지 과실을 그린 ≪과일첩≫을, 8월 1일부터 8월 20일 <나팔꽃>을 마지막으로 그린 ≪화초첩≫도 완성하고 있다. 9월 18일 오전, 어머니는 의사를 부르러 가고, 구가 가쓰난 부부, 헤키고토, 여동생 리쓰가 둘러앉아 머리맡을 지키는 가운데 마지막 힘을 다해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절필 3구(句)를 쓰고 나서는 곧 혼수상태에 들어간 채로 이튿날 9월 19일 새벽 1시에 영원히 숨을 거둔다. 만 35년의 생애였다.
옮긴이
손순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고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사생(寫生)’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메이지 시기의 일본 지식인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1989년 도쿄대학교 객원 연구 교수를 지냈으며,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 및 한국 일본언어문화학회 회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시가(詩歌)와 회화(繪畵)≫(중앙대학교 출판부, 1995), ≪子規の現在≫(공저, 增進會出版社, 2002), ≪조선통신사와 치요조의 하이쿠≫(한누리미디어, 2006), ≪韓流百年の日本語文學≫(공저, 人文書院, 2009)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어느 날 아침 미쳐 버리다(吉增剛造詩選集)≫(들녘, 2004), ≪모리 오가이 단편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메이지 시대의 반전시 연구> 등을 비롯한 많은 논문이 있다.
차례
붓 가는 대로
송라옥액
묵즙일적
앙와만록
기타 잡지
병상육척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병상에 누워 홀로 듣고 있으면 울타리 밖에 이웃집 아낙네들이 서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재미있다. “이봐요, 초롱을 빌렸으면 새 양초를 끼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전에 넣어 두었던 양초까지 가져가 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이런 일이…”라고 누군가의 험담을 하고 있다. 지금의 정치가, 실업가 등은 모두 초롱을 빌려서 양초를 빼앗아 가는 쪽이다. 더욱 뻔뻔스러운 녀석은 초롱마저 가져가 버리고 태연한 얼굴을 하는 녀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