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박용철(1904∼1938)은 1930년 3월 자신이 창간한 ≪시문학≫ 제1호를 통해 등단한 이후 약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시인, 비평가, 번역가, 극예술인, 출판 편집 발행인의 역할을 겸한 동시에 ‘시문학’ 유파를 형성하고 순수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1930년대 한국 시문학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박용철은 그리 길지 않은 문학 활동 기간에 시 창작 이외에도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과 같은 문학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순수시론의 이론화를 선도했고 또 330여 편에 이르는 해외 서정시 번역에도 집중했으며 해외 극본을 번역하고 연극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시인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1930년대 한국 시문학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용철의 창작 시가 다른 시인들에 비해 편수도 적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 세계와 시론적 지표가 일치하지 않는 점,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 등으로 인해 그를 시인으로 평가하는 데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오히려 비평가로서의 위상이 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는 카프 문인들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시론 그리고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시론이 경합하는 가운데 박용철이 순수시 유파를 형성하면서 순수시의 이론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박용철의 순수시론은 문학의 이념성과 기법·기교적 측면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순문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탐색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를 시인과 현실 세계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존재물로 파악하면서 심미적 경험의 순수성과 예술적 자율성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민족어로서의 ‘국어’가 아닌 문학 언어, 즉 ‘시어’로서의 언어적 자각을 명료히 함으로써 일제 식민 치하에서 조선어의 시적 가능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0자평
1930년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박용철. ‘고처’에 자리한 ‘서정시의 고고한 길’을 걸어가겠다던 그는 “압 대일 어덕” 하나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나 두 야 가련다”라는 시구만 남긴 채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영영 떠났다. 중복된 작품을 제외하고 대표작 <떠나가는 배>를 비롯한 82수의 시를 모두 수록했다.
지은이
박용철(朴龍喆, 1904∼1938)은 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엮은이
이혜진(李慧眞)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일본 도쿄외국어대학 총합국제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현재는 세명대학교 교양과정부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최재서 비평연구>, <내선일체의 차질>, <1920년대 자연주의문학론의 메타내러티브>, <문인동원의 병참학> 등이 있고, 저서로 ≪사상으로서의 조선문학: 전시체제기 한국문학의 윤리≫가 있으며, 역서로는 ≪정인택 작품집≫(편역), ≪화폐 인문학≫, ≪자유란 무엇인가≫, ≪최재서 일본어 소설집≫ 등이 있다.
차례
三行詩
나무닢 피기 전
봄에 부는 바람
○
○
Happiness Renewed
나그냇길의 아침
○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이대로 가랴마는
싸늘한 이마
비 나리는 날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우리의 젓어머니(소년의 말)
한 조각 하날
사랑하든 말
仙女의 노래
哀詞 中에서
哀詞·1
時調五首
마음의 墜落
哀詞·3
고향
어듸로
時調六首
斷片
<곻은 날개>篇
밤
小惡魔
그 전날 밤
希望과 絶望은
萬瀑洞
비
無題
Be nobler!
絶望에서
나는 네 것 아니라
부엉이운다
무덤과 달
비에 젖은 마음
斷想·1
斷想·2
기다리든 때
失題
失題
冬至
忘却
로−만스
센티멘탈
새로워진 幸福
빛나는 자최
三部曲(夏의 部)
나는 그를 불사르노라
다시
두 마리의 새
사티−르
유쾌한 밤
失題
失題
눈은 나리네
눈
달밤 모래 우에서
어느 밤
솔개와 푸른 쏘
하욤없는 바람의 노래
失題
좁은 하눌
너의 그림자
邂逅
안 가는 時計
人形
타이피스트 孃
戀愛
눈
Invocation
祈願
試作四首
失題
失題
失題
漢詩習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안윽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가치 물 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뫼ㅅ부리 모양
주름쌀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닛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도라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네
압 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잇슬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비 나리는 날
세염도 업시 왼 하로 나리는 비에
내 맘이 고만 여위여 가나니
앗가운 갈매기들은 다 저저 죽엇겟다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나는 이제 가네.
눈물 한 줄도 아니 흘리고 떠나가려네.
어머니 치마로 눈을 가리지 마서요.
너희들도 다 잘 잇거라.
새벽빛이 아즉도 히미해서 얼골들이 눈에 서투르오,
다시 한 번 눈이라도 익여 둡시다.
공연히 수선거리지들 마러요.
남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줄도 모르고.
황토 붉은 산아 푸른 잔듸밧아 다 잘 잇거라.
잔자갈 시냇물도 잘 노라 지나거라.
—가면 아조 가나, 잔 사정 작별을 내 이리하게!
봉선화야 너는 거년까지 내 손가락에 물드리엿지?
순이야, 금이야, 남이야, 빗나든 철의 동모들아,
이제는 동모라는 말조차 써 볼 데가 업겟고나,
너의들 따− 느린 머리를 어듸 좀 만저 보자.
붉은 단기 울 넘으로 번득이는 자랑스러움,
거리낄 데 하나 업시 굴러가든 너이들 우슴,
이것이 어느새 남의 일가치 이약이 될 줄이야!
손 하나 타지 안코 산골에 맑은 힌나리 꽃송이가치,
매인 데 굽힐 데 업시 자라나든 큰아기 시절을
내 이제 뒤으로 머리 돌려 앗가워할 줄이야!
눈물은 내서 무엇하늬,
가고야 마는 것을! 가면 아조 가랴만은.
남는 너희나 그대로 잇서지다고 내 다시 볼 때까지.
아버지 이 길은 무슨 길이길래,
눈물에 싸여서라도 가고 보내는 마련이래요?
마른 닢은 부는 바람에 불려야만 되나요?
손에 달코 눈에 익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득한 바다에 몸을 띄워야만 새살림 길인가요?
갈피 업는 걱정 쓸데업는 앙탈을 이냥 삼키고,
나는 떠나가네.
싸늘한 두 손으로 얼골을 싸 만지며.
●눈은 나리네
이 겨을의 아츰을
눈은 나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가 하노라
님이여 서른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나리여
우리 함께 빌 때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