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루쉰의 작품집 가운데 ≪새로 엮은 옛이야기(故事新編)≫(1936)는 ≪납함(ㅍ喊)≫(1923), ≪방황(彷徨)≫(1926)에 이어 세 번째로 출판된 소설집으로, 제목처럼 ‘옛이야기(故事)’인 신화와 전설, 역사 등의 소재에 현대적인 색채를 입혀 ‘새로 엮은[新編]’ 작품들이다. 모두 여덟 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13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단속적(斷續的)으로 창작되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형식, 기법 면에서 이전 ≪납함≫이나 ≪방황≫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실험적일 뿐 아니라 작가의 일관된 창작 의도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먼저 인물 면에서 ≪새로 엮은 옛이야기≫는 중국 문화사에서 성인과 영웅으로 떠받들어져 온 여와, 예, 우(禹),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연지오자(宴之敖者), 노자(老子), 묵자(墨子), 장자(莊子) 등이 등장하며, 그들의 숭고하고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보다는 구체적인 현실 문제 앞에서 곤란을 겪으며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 그들은 하나같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뭇사람들로부터 이용당하거나, 평범한 인물로 전락하거나 나약해지며, 허위와 위선의 인물로 희화화되는 등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런 과정 가운데 루쉰이 구사한 ‘익살’ 기법은 현실의 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익살’ 기법은 특히 현대에나 있을 법한 생활 방식이나 용어들을 삽입하는 데서 풍자 효과를 일으키는데, 독자는 고금(古今)이 뒤섞인 역사 화면을 통해 비판의 대상이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온존하는 해악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중국 문화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심지어 민중에게 이용당하고 외면당하는 현실은, 한 이상적인 인물이 출현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인 토양은커녕 오히려 이들의 출현을 방해하고 압살하는 암흑적인 구조가 문명 시초부터 얼마나 뿌리가 깊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 엮은 옛이야기≫는 현실의 암흑 구조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중국인의 비극적인 정신세계를 철저히 드러냄으로써 각성을 촉구하려 했던 소설집 ≪납함≫, ≪방황≫에 비교해 볼 때 소재와 창작 방식만 다를 뿐 주제 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각성을 촉구한 소설집이라 할 것이다.
200자평
현실에 발을 딛고 역사 속에 퇴적되어 온 중국의 ‘영혼’을 드러내고자 했던 루쉰의 창작 지향을 엿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작가는 친숙한 신화, 전설 속 주인공들을 출현시킴으로써 현실을 변혁하는 주체이자 중국 문명 기원의 정신상을 제시한다.
지은이
루쉰은 1881년 중국 강남의 문화 명승인 사오싱(紹興)에서 한 사대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8세 때 난징에서 본격적으로 근대과학을 배우기 시작해 이후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 고분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 및 기초 지식 과정을 수료한다. 이후 그는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지만 재학 중 한 수업 시간에 본 슬라이드에서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군인한테 공개 처형을 당하는 동포를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루쉰은 중국인의 몸을 치료하는 일보다 그들의 마비된 정신을 각성시키는 일, 즉 정신 계몽이 더욱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그는 도쿄에서 문예 잡지 발간을 기획하며 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애국주의적 열정을 호소하는 글들을 발표할 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단편소설을 번역해 출판하는 등 매우 열정적으로 문예운동에 투신한다. 귀국 후 루쉰은 고향에서 화학과 생물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혁명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자신도 혁명에 적극 가담하는데, 그 혁명이 바로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하지만 혁명 후 제도는 바뀌었어도 군벌과 타협한 근본적 한계를 갖고 출범한 혁명정부이기에 개혁의 움직임은 기대 이하였고, 나중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억압적이어서 다시 그에게 커다란 실망감과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중화민국 교육부가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가면서 당시 교육 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초빙으로 교육부 첨사(僉使) 발령을 받고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루쉰은, 직무 외 대부분의 시간을 고서(古書) 정리나 비석 탁본, 골동품 수집 같은, 전통 문화를 정리하는 일로 보내며 몇 해 동안 침잠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청년(新靑年)≫이란 계몽 잡지 발간을 준비하던 친구의 부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인 <광인일기(狂人日記)>다. 1926년 돤치루이(段棋瑞) 정부의 시위대 유혈 진압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수배령이 내려지자 루쉰은 베이징을 떠나 아모이(廈門)와 광저우(廣州)로 잠시 피신했다가 그 이듬해인 1927년부터 상하이(上海)에 정착한다. 그는 상하이에 있는 동안 창조사(創造社)나 태양사(太陽社)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인 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같은 우익 그룹과 논전한 것은 물론 19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 등과도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1936년 10월 19일 5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의 장례식은 민중장(民衆葬) 형식으로 치러졌고, 그의 치열했던 작가 정신은 ‘민족혼’이란 이름으로 후대 중국 작가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옮긴이
구문규(具文奎)는 숭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우송대학교 글로벌문화비즈니스학부 중국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현대 중국문학으로, 루쉰의 문학을 비롯해 현대 중국 지식인의 인문 정신과 문화 심리에 관해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역서로는 ≪루쉰 잡문 예술의 세계≫(학고방, 2003) ≪들풀≫(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새로 엮은 옛이야기≫(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저서로는 ≪한중 고전소설 연구 자료의 새 지평≫(공저, 채륜, 2008), ≪중국의 영화 문화≫(공저, 天津大學出版社, 2003) 등이 있다.
차례
≪새로 엮은 옛이야기≫ 머리말
하늘을 보수한 여와 이야기
달로 도망간 항아 이야기
물을 다스린 우 이야기
고사리 캐는 백이숙제 이야기
검을 벼린 연지오자 이야기
관문(關門)을 떠난 노자 이야기
전쟁을 막은 묵자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린 장자 이야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예는 한 손으로 활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 개의 화살을 움켜쥐었다. 이내 화살을 메겨서는 달을 겨누고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의 몸은 바위처럼 버티어 섰고, 눈빛은 바위를 때리는 번갯불처럼 번쩍거리며 똑바로 쏘아봤다. 머리와 수염은 바람에 날려 마치 검은 불길과도 같았다. 이 순간, 사람들은 젊은 시절 해를 쏘던 예의 그 웅장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