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화’라는 새로운 양식의 글쓰기는 구양수(歐陽修)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어 ≪시화(詩話)≫라는 이름으로 첫 작품이 탄생했고, 얼마 후 이에 감명을 받은 사마광(司馬光)에 의해 시화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속시화(續詩話)≫가 탄생했으며, 이후 많은 문인들이 계속해서 이들을 본뜬 시가 비평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시화’는 서서히 중국 시가 비평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시화만 해도 수백 종에 이르며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화 저작이 나오고 있다.
시화가 천여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중국 시가 비평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시가 비평서와 차별화되는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시화가 다른 시가 비평 양식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시에 관한 담론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구양수가 ≪시화≫의 서두에서 스스로 “이 이야기들을 모아 한담거리를 제공한다(集以資閑談也)”라고 밝힌 바와 같이, 시화는 마치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시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화는 이야기의 편폭에 제약이 없고, 이야기의 배열과 구성이 매우 자유롭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항목이 대개 100∼200자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항목들이 단편적이고 독립적인 이야기인지라 인접한 항목들 간에 연관성이 없으며 항목의 배열에도 정해진 원칙이 없다. 또한 서술 대상 시기나 서술 대상 시인의 선택도 제한 없이 자유로워 당송(唐宋) 시대의 시뿐 아니라 선진(先秦)·양한(兩漢) 시대의 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대시인들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시인들까지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시화는 서술 체제나 서술 범위가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이야기한 내용도 아주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시의 본사와 시인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고, 시어와 시구(詩句)에 대한 해석과 고증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시인에 대해 비평하기도 했다. 또한 시단의 풍조에 대해 묘사하거나 평가하기도 했고, 시관(詩觀)을 전개하기도 하는 등 시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전개했다. 이와 같이 시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에 창시자인 구양수가 여기에다 이러한 내용들을 포괄할 수 있는 ‘시화’라는 명칭을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의 시화는 이전의 시가 비평서와 달리 비평 중심이 아니라 기사(記事) 중심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냥 잡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인데 이들 시화 속의 수많은 기사 중에는 시와 관련 있는 다양한 자료가 보존되어 있어서 일차적으로 시학 연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며, 나아가 사회·문화 연구를 위한 자료와 언어학 연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화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유구한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사백초(謝伯初) 등 무명 시인들의 시구가 시화 안에 많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시화의 기록을 통해 조정의 상황과 관리들의 생활상 등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볼 수도 있고, 축국(蹴踘)·주령(酒令)과 같은 당시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시화는 운자(韻字)·평측(平仄)·성조(聲調)·구어·속어·은어·방언 등 언어학 방면의 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자료도 상당히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도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렇듯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시화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00자평
중국 최초의 시화집인 구양수의 ≪시화(詩話)≫와 이에 감명을 받아 이어 쓴 사마광의 ≪속시화(續詩話)≫를 함께 묶었다. 시화는 중국 특유의 비평 양식으로, 시와 시인에 대한 비평, 해석과 고증은 물론 시인의 일화나 시단의 풍조, 저자의 시관 등 시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폭넓게 다룬다. 시학과 언어학, 사회학적인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 시인과 시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시를 더 다채롭게 맛볼 수 있다.
지은이
≪시화(詩話)≫의 지은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 겸 역사가로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가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문학가로서의 구양수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뛰어난 문장가요 송시(宋詩)의 특질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일 뿐만 아니라 송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사인(詞人)이기도 했으며, 역사가로서의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였다.
그는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면주[綿州,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몐양(綿陽)]에서 당시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으로 재임 중이던 구양관(歐陽觀, 952∼101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수주[隨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쑤이저우]에 있는 숙부 집에 의탁했다. 다행히 양가집 딸인 어머니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양수는 어머니에게 글자를 배울 수 있었는데 종이와 붓이 없어 갈대를 붓으로 삼고 모래를 종이로 삼아 글자를 익혔다.
스물네 살 되던 해인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서경유수는 전유연(錢惟演)이었는데 그의 막부에 윤수(尹洙)·매요신(梅堯臣) 등의 뛰어난 문인들이 있어 그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그들의 영향으로 시문 혁신(詩文革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경우(景祐) 3년(1036)에 재상 여이간(呂夷簡)의 횡포를 옹호하는 고약눌을 비판하다가 이릉[夷陵,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현령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경력(慶曆) 5년(1045)에 저주[滁州,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지주(知州)로 나갔는데 저주지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취옹이라는 자호를 짓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불후의 명문을 창작했다.
경력 8년(1048)에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지주(知州)로 부임해 재임 기간에 평산당(平山堂)이라는 유명한 건물을 지었고, 황우(皇祐) 원년(1049)에 영주[潁州, 지금의 안후이성 푸양(阜陽)]지주로 부임했는데 서호(西湖)를 비롯한 영주의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나중에 그곳을 퇴거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한 그는 태학체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태학체로 작성한 답안을 불합격시켰고 소식(蘇軾)을 발굴했다.
구양수는 그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추밀부사(樞密副使)·호부시랑(戶部侍郞)·참지정사(參知政事)와 몇몇 고을의 지주를 더 역임하고 신종(神宗) 희녕(熙寧) 4년(1071) 6월에 마침내 사직을 허락받아 7월에 영주로 돌아가서 한가로이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가로운 생활을 오래 즐기지 못하고 1년 뒤인 희녕 5년(1072) 윤7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66세였다. 문집으로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속시화(續詩話)≫의 지은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북송 때의 유명한 역사가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호가 우수(迂叟)다. 섬주(陝州) 하현[夏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샤현] 속수향(涑水鄕) 출신이기 때문에 속수선생이라고도 하고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온공(溫公)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사마지(司馬池, 980∼1041)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상황 판단이 빠를 뿐만 아니라 결단성도 있었다.
인종(仁宗) 보원(寶元) 원년(1038)에 스무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간 그는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관각교감(館閣校勘)을 맡았는데 이것은 경전과 역사를 좋아한 그에게 조정의 각종 전적을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황우 5년(1053)에 사관검토(史館檢討)라는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음으로써 더욱더 역사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종(神宗)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강행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낙양(洛陽)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294권이나 되는 거질의 역사책 ≪자치통감≫을 저술했다.
원풍(元豊) 8년(1085)에 신종이 세상을 떠나고 열 살짜리 아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섭정이 된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신법을 싫어한 나머지 구법파의 영수인 사마광을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자 사마광은 신법파 인사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제정한 신법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폐기해 버렸다. 그러나 조정으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원우(元祐) 원년(1086) 10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 ≪자치통감≫ 이외에 ≪온국문정사마공문집(温國文正司馬公文集)≫·≪계고록(稽古錄)≫·≪속수기문(涑水記聞)≫·≪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 등이 있다.
옮긴이
옮긴이 류소진(柳素眞)은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북송시화연구(北宋詩話硏究)>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소식의 고려 및 조선 한문 시단에 대한 영향(蘇軾對高麗及朝鮮漢文詩壇的影響硏究)>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한국교원대학교·한양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고려 시기의 ‘동파열’과 이규보 시가(高麗時期的‘東坡熱’與李奎報詩歌)>·<한국 고대 문인의 화소시(韓國古代文人的和蘇詩)>·<소식의 해동강서시파에 대한 영향(蘇軾對海東江西詩派的影響)>·<조선 중기 문인 신흠(申欽)의 소식관(蘇軾觀)>·<조선 중기 성리학자 신흠(申欽)의 화소시(和蘇詩)>·<육일시화(六一詩話)의 시가 인용 양상> 등이 있다.
차례
시화(詩話)
저술 동기
제1화 이방(李昉)의 <영창릉만가사(永昌陵挽歌辭)>
제2화 인종(仁宗) 시기의 백낙천체(白樂天體)
제3화 두 서울의 실사를 묘사한 시
제4화 매요신(梅堯臣)의 시 <복어(河豚魚)>
제5화 서남쪽 오랑캐의 활집 무늬로 사용된 매요신(梅堯臣)의 <춘설(春雪)>
제6화 지체 높은 승려를 싫어한 정곡(鄭谷)의 시
제7화 정곡(鄭谷)의 시와 매요신(梅堯臣)의 시
제8화 “새 한 마리 지나가듯 몸이 가볍다(身輕一鳥過)”
제9화 구승(九僧) 시의 특징
제10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궁상(窮狀)을 노래한 시
제11화 만당(晩唐) 시인 주박(周朴)의 시
제12화 묘사하기 어려운 경물과 다하지 않는 뜻이 있는 시
제13화 호방하고 초탈한 소순흠(蘇舜欽)의 시와 심원하고 담박한 매요신(梅堯臣)의 시
제14화 호단(胡旦)에게 무시당한 여몽정(呂蒙正)
제15화 간을 앓고 콩팥에 바람이 든 시와 고양이를 잃어버린 시
제16화 왕건(王建)의 <궁사일백수(宮詞一百首)>에 묘사된 이원영(李元嬰)의 <협접도(蛺蝶圖)>
제17화 ‘태수생(太痩生)’과 ‘말궐병(末厥兵)’
제18화 이치에 맞지 않으면 멋진 시구가 아니다
제19화 소순흠(蘇舜欽)·소순원(蘇舜元) 형제의 시
제20화 시인의 마음과 다른 독자의 마음
제21화 서곤파(西崑派) 시의 멋진 구절
제22화 낙양(洛陽)을 노래한 전유연(錢惟演)과 정문보(鄭文寶)의 시
제23화 사백초(謝伯初)의 시
제24화 석연년(石延年)의 신선적 삶과 시풍
제25화 왕건(王建)의 <예상사(霓裳詞)>
제26화 조사민(趙師民)의 시
제27화 관운(寬韻)은 통용하고 착운(窄韻)은 전용한 한유(韓愈) 시의 압운
제28화 송기(宋祁)의 시 <오색 과녁(采侯)>
속시화
저술 동기
제1화 조정의 실사를 묘사한 시
제2화 옛날 사람의 시구를 많이 차용한 혜숭(惠崇)의 시
제3화 매요신(梅堯臣)과 한종언(韓宗彦)의 죽음
제4화 정문보(鄭文寶)의 멋진 시구
제5화 과거 시험 때 지은 시 중의 보기 드문 명작
제6화 상관의 총애를 얻게 한 포당(鮑當)의 시
제7화 임포(林逋)의 시 <산속 동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
제8화 위야(魏野)의 시와 인품
제9화 정위(丁謂) 시 중의 경구(警句)
제10화 재주와 생각이 깊고 원대한 구준(寇準)의 시
제11화 진요좌(陳堯佐)의 시
제12화 매일 시를 두세 편씩 지은 방적(龐籍)
제13화 처사 한퇴(韓退)의 생활과 시
제14화 석연년(石延年)이 지은 장헌태후(章獻太后) 만가
제15화 이하(李賀)의 시에 필적할 만한 석연년(石延年)의 대구(對句)
제16화 언어 바깥에 행간의 뜻을 담은 두보(杜甫)의 시
제17화 유개(劉槩)의 위인과 은거 생활을 노래한 부필(富弼)의 시
제18화 관작루(鸛雀樓)를 읊은 왕지환(王之渙)과 창제(暢諸)의 시
제19화 약재 이름을 활용한 진아(陳亞)의 시
제20화 벼슬을 내려도 사양한 양박(楊朴)의 시
제21화 유균(劉筠)과 한기(韓琦)의 시
제22화 미묘하고 완곡한 한기(韓琦)의 시
제23화 환관(宦官) 왕신(王紳)의 궁사(宮詞)
제24화 ≪구승시집(九僧詩集)≫의 편찬자 진충(陳充)과 소장자 민교여(閔交如)
제25화 고향에 갔다가 다시 경사로 돌아오면서 지은 범진(范鎭)의 시
제26화 유풍(劉諷)을 전송한 범진(范鎭)과 주공작(朱公綽)의 시
제27화 사람들의 칭송을 받은 경선지(耿僊芝)의 시
제28화 종신기(終身記)라 할 만한 ≪초학기(初學記)≫
제29화 ‘종곤(宗袞)’의 생활신조
제30화 두보(杜甫)의 묘지는 뇌양(耒陽)인가 공현(鞏縣)인가?
제31화 한악(韓渥)의 시에 나타난 ‘과마(過馬)’의 의미와 당나라 지방 군사 장관의 과마청(過馬廳)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매요신(梅堯臣)의 시 <복어(河豚魚)>
매성유(梅聖俞)가 한번은 범희문(范希文)이 마련한 자리에서 <복어(河豚魚)>라는 시를 지어 “봄철의 모래톱에 갈대 싹 나고, 봄을 맞은 강 언덕에 버들개지가 나네. 복어는 이때가 되면, 귀해져서 물고기나 새우는 치지도 않네”라고 했다. 복어는 언제나 늦은 봄에 나와 물 위에서 떼를 지어 헤엄치다가 버들개지를 먹고 살찐다. 남방 사람들은 대개 갈대 싹과 함께 국을 끓이고는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를 아는 사람들은 첫머리 두 구절만으로 이미 복어의 장점을 다 말했다고들 한다. 매성유는 평생 시 읊기에 고심했는데 한적하고 심원한 것과 예스럽고 담박한 것을 시정(詩情)으로 삼았기 때문에 시를 구상하는 것이 지극히 힘들었다. 이 시는 술자리에서 지어졌지만 필력이 웅건하고 넉넉하며,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결국 절창이 되었다.
梅聖俞嘗於范希文席上賦<河豚魚>詩云 : “春洲生荻芽, 春岸飛楊花. 河豚當是時, 貴不數魚鰕.” 河豚常出於春暮, 羣遊水上, 食絮而肥. 南人多與荻芽爲羹, 云最美. 故知詩者謂秪破題兩句, 已道盡河豚好處. 聖俞平生苦於吟詠, 以閑遠古淡爲意, 故其構思極艱. 此詩作於罇爼之間, 筆力雄贍, 頃刻而成, 遂爲絶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