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홍콩 작가 타오란(1943~ )의 중편소설인 <미로를 빠져나오며>,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 <양팔 저울> 세 편을 실은 것이다. 타오란은 홍콩을 홍콩 안에서 혹은 중국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한다. 홍콩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홍콩 소설 세 편을 통해 홍콩 문학의 특징을 살펴보고 인문학적 위치에서 홍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타오란은 홍콩의 남래작가(南來作家)로 분류된다. 그는 인도네시아 화교 신분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한 후 홍콩으로 이주해 온 작가다.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홍콩은, 홍콩에서 나고 성장한 소위 본토 작가가 바라보는 홍콩과는 다른 그림의 홍콩이다. 예쓰(也斯)는 홍콩의 본토 작가에 속하는, 지명도 높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예쓰는 ≪포스트식민 음식과 사랑≫이라는 단편소설집을 통해 홍콩의 혼종된 모습을 음식으로 형상화해 보여 주고 있다. 예쓰는 홍콩을 홍콩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홍콩을 사유하고 그리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성했다. 이에 비해 타오란은 홍콩을 홍콩 안에서 혹은 중국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했다. 동일한 하나의 홍콩을 작가의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그려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여러 개의 다른 홍콩을 통해서 우리는 홍콩의 단면이 아닌 하나의 홍콩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타오란은 홍콩을 사유하는 또 다른 길을 열어 준 셈이다.
<미로를 빠져나오며>는 인물의 내면 의식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스토리 구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어 전통적인 심리 소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 지유셍틴의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칭에서도 1인칭과 3인칭이 혼재되어 있어 주관성과 객관성이 서로 교차하고 있고 심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 역시 서로 얽혀 있어 표면적으로 볼 때 소설이 질서가 없어 보이고 복잡해 보이지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심미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토리는 지유셍틴과 박렝엥 사이의 사랑 이야기다. 둘은 직장 동료로 박렝엥은 지유셍틴의 조수로 입사한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사장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뜻밖에도 박렝엥이 회사의 사장이 되면서 둘의 사이에 서서히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작가는 박렝엥을 통해서 홍콩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배금주의 사상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전과 자리 즉, 부와 권력의 획득으로 변화하는 인간성과 사고·지각은 당시 홍콩 사회에 만연해 있던 사회 병폐 현상의 한 단면인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박렝엥이 변해 가는 태도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시적인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해 어렴풋하고 모호한 한 인간의 정서를 표출해 냄으로써 인생에 대한 어떤 철학적 사고를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 시우왕셍의 내면 독백을 통해 현실과 허구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교차시켜 줌으로써 도시인의 불명확하고 모순적인 사랑과 심리 상태를 그려 내고 있다. 이를 통해 도시 문학의 현대적인 특징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내면 독백과 의식의 흐름을 주선율로 해 스토리를 구성해 가고 있다. 또한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혼재와 교차를 통해 환상과 현실이 종종 만나는 지점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교차 지점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미지를 형상화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몽타주 기법 역시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의 흐름 수법이나 몽타주 기법을 이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설에서는 긴장감과 유연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촬영 기자인 시우왕셍은 우연한 기회에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화가 윤유메이를 만나게 된다. 윤유메이는 비록 미국에 남편이 있고 딸도 있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우왕셍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1997년이 되기 전에 윤유메이는 미국으로 떠나 버리고 시우왕셍도 평범한 여자 이깜과 결혼을 해 생활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윤유메이를 잊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에 가고 비행기가 연착되어 여섯 시간 동안 공항에 갇히게 된다. 그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내면의 독백 그리고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 등이 이 소설의 줄거리라 할 수 있다. 가상의 인물 홍지하의 설정 역시 소설의 긴장감을 더욱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삶의 현장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인생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시우왕셍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살고 있는 현대 도시인의 삶에 대한 무언의 조언인지도 모른다. 시적인 주제 속에 작가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양팔 저울>은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 젊은이들의 결혼관을 이민과 연관해 엮어 내고 있어 당시 홍콩인들의 심리 상태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미로를 빠져나오며>,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 역시 1997년 홍콩의 정치적 현안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들 소설 역시 이러한 물리적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창작된 작품들이고 그러한 시대 배경과 현상들을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소설의 주선율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양팔 저울>은 1997년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부각하고 그 위에 젊은이들의 사랑관과 결혼관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타오란은 심리 묘사에 뛰어나다. 이 소설 역시 내면의 독백인 일기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서 단락으로 구분된 숫자 0~00까지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시작 부분인 0은 훵위시가 웬족옝을 만나는 장면이고 00은 훵위시가 웬족옝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 사이의 1~12까지의 소단락에서 홀수는 훵위시의 심리를, 그리고 짝수는 웬족옝의 심리를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생각과 심리적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마치 한 사건에 대한 두 사람 각자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서술에 대한 전체적인 인칭은 1인칭과 3인칭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작가가 시작을 0으로, 마지막을 00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겠지만 역자가 생각하기에는 주인공 훵위시와 웬족옝의 사랑은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맡고 있는 훵위시는 사장의 심부름으로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웬족옝을 알게 되고 차츰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웬족옝은 부모님이 결혼 상대자로 지목한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촌 오빠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참에, 한때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친구의 남편인 궉와이끽의 대타로 훵위시와 교제하고자 한다. 웬족옝은 훵위시를 만나면서도 내면으로는 궉와이끽과 계속 비교하며 갈등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웬족옝은 마음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녀에게 가장 좋은 조건은 미국 이민이었다. 비록 마음으로는 훵위시에게 끌렸지만 결국은 조건이 좋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훵위시가 소개해 준 린퍽췬과 결혼을 약속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당시 홍콩 사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민이 그들에게 유일한 출구처럼 보였다. 물론 모든 홍콩인이 다 이민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분명 이민이 대세였다. 작가는 이러한 사회현상의 한 단면을 순수해야 할 젊은이들의 사랑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웬족옝이 홍콩 젊은이들의 결혼관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모습은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이자 파편이었음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홍콩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분명 당시 홍콩 사회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00자평
지만지 소설선집. 홍콩 작가 타오란(1943~ )의 중편소설인 <미로를 빠져나오며>,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 <양팔 저울> 세 편을 실은 것이다. 타오란은 홍콩을 홍콩 안에서 혹은 중국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한다.
<양팔 저울>은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 젊은이들의 결혼관을 이민과 연관해 엮어 내고 있어 당시 홍콩인들의 심리 상태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미로를 빠져나오며>,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 역시 1997년 홍콩의 정치적 현안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들 소설 역시 이러한 물리적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창작된 작품들이고 그러한 시대 배경과 현상들을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소설의 주선율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양팔 저울>은 1997년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부각하고 그 위에 젊은이들의 사랑관과 결혼관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은이
타오란은 1943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투나이셴(涂乃賢)이고 본적은 중국 광둥성(廣東省) 쟈오링셴(蕉岭縣)이다. 그는 16세에 인도네시아 반둥 지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1960년대 초반에 베이징 사범대학 중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때였다. 당시 타오란은 화교 신분이었고 스스로 이런 정치적 동란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행동하는 것보다 조용히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당시 소일파(逍遙派)의 한 사람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저명한 문학작품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그는 루쉰의 작품과 프로스페르 메르메의 ≪카르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 총서 작품을 무척 좋아했고, 스탕달, 잭 런던, 헤밍웨이의 작품도 즐겨 읽었다. 그의 이러한 문학작품에 대한 경험은 그의 작품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73년 그가 베이징을 떠나 홍콩을 경유해 인도네시아로 가던 중 중국 이민 회유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에 그는 홍콩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에게 그것이 인연인지 숙명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인생 편력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형상화해 나타나고 있다. 홍콩에 정착한 다음 해인 1974년, 그는 처음으로 홍콩의 ≪주말 신문(周末報)≫에 단편소설 ≪겨울밤(冬夜)≫를 발표하고 동시에 홍콩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타오란은 홍콩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출생지 인도네시아와 자신의 문학적 기반을 마련해 준 베이징을 서로 스치면서 사유하고 소통하는 작가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의 배경은 주로 인도네시아, 베이징 그리고 홍콩이지만 이 세 지역 중에서도 단연 홍콩이 작품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현재 그는 월간 잡지 ≪홍콩문학(香港文學)≫의 편집장과 일간지 ≪중국 여행(中國旅游)≫ 부편집장을 역임하고 있다. 타오란은 1974년 소설 ≪겨울밤(冬夜)≫과 산문 ≪눈(雪)≫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까지 약 사십 년간 작품 창작을 계속해 오고 있다. 주요 소설 산문집으로는 ≪강자의 힘(强者的力量)≫, ≪홍콩 내외(香港內外)≫, 장편소설 ≪추적(追尋)≫, ≪너와의 동행(與你同行)≫, ≪같은 하늘(一样的天空)≫, 중편소설 <양팔 저울(天平)>, <마음의 일렁임(心潮)>, 중단편소설집 ≪회전무대(旋轉舞臺)≫, ≪크리스마스이브(平安夜)≫, ≪밀월(蜜月)≫, ≪미인(紅顔)≫, 단편소설집 ≪엿봄(窺)≫, 산문집 ≪메아리(回音壁)≫, ≪기다림(此情可待)≫, ≪실루엣(側影)≫, ≪달 밝은 오늘 밤(月圓今宵)≫, 산문 시집 ≪야상곡(夜曲)≫, ≪황혼 전차(黃昏電車)≫ 등이 있다.
옮긴이
송주란은 경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也斯 산문의 홍콩성 연구-1970~8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현재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학 중이며, 논문으로는<通過 “後殖民食物與愛情” 看對香港的想象和現在的香港>(2011) 등이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홍콩 문학과 홍콩 문화로, 특히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변화된 홍콩 사회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홍콩 사회 및 그 문학과 문화가 전지구화와 지역화, 포스트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및 재민족주의, 후기자본주의와 디아스포라 등의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에는 동료 청년 연구자들과 함께 부산대학교 현대중국문화연구실에서 홍콩 문학, 타이완 문학, 화인 화문 문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차례
미로를 빠져나오며(走出迷墙)
먼 하늘가 노랫소리에 묻어 있는 눈물(天外歌聲哼出的淚滴)
양팔 저울(天平)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하지만 훵위시는 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내게 키스하도록 내버려 둔 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난 그에게 감미로운 추억을 남겨 줌으로써 그가 지불한 감정에 대한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난 그를 받아들이길 간절히 원했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종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사랑? 어린 여자아이들이나 동경하는 것이다. 난 눈 깜작할 사이에 서른이 될 것이다. 영원히 성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빠, 엄마도 나를 괄목상대할 것이다. 엄마는 늘 말했다. “옝, 넌 왜 늘 이 모양이니, 너 어떡할 거니?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한단 말이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간다. 미국으로 시집을 가게 됐다. 앞으로 아빠, 엄마도 이민 갈 조건이 생긴 것이다.
―<양팔 저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