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년 시절≫은 한스 카로사의 자전소설이다. 자전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는 유년기의 한 소년의 삶을 통해 어린 영혼 일반이 관찰하고 느끼는 감정을 리얼하게 재현해 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년기를 인간 존재의 서막으로 보고, 어린아이의 의식을 어른의 예지를 통해 회상하게 하고 있다. 전 16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일화의 형식을 띠면서도 각 일화가 분리되어 따로 놀지 않고 한 알 한 알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 염주나 묵주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연결고리를 이루는 것은 주인공 ‘나’의 의식 세계다. 작가는 주인공의 의식 세계를 어른의 눈, 즉 객관적인 눈으로 냉철하게 바라본다. 평범한 아이의 마음과 행동, 주관과 객관세계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고, 망막에 투영된 상들을 가감 없이 옮겨 적는다. 이렇듯 유년 시절의 기억을 세밀화처럼 생생하게 재현하고, 어린아이의 행동거지와 심리 세계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한스 카로사는 헤르만 헤세를 방불케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의 ‘정원’의 장에서 작가가 자상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자연을 극찬했다. 그는 카로사에게 “한밤중에 나는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유년 시절≫의 ‘정원’을 찾아냈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스러운 책들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카로사는 헤세처럼 아름다운 식물의 세계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벌레들, 심지어 땅속을 기는 해충들에게도 현미경을 들이댄다.
200자평
독일의 국민 작가 한스 카로사의 자전소설이다. 세 살부터 김나지움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한 어린아이의 삶을 통해 유년 시절의 기억을 세밀화처럼 생생하게 재현하고, 어린아이의 행동거지와 심리 세계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헤르만 헤세를 방불케 한다. 카로사는 ≪유년 시절≫, ≪어느 청춘의 변화≫, ≪아름다운 현혹의 해≫ 등으로 독일의 자전소설사에 크게 기여했다.
지은이
한스 카로사는 1878년 퇼츠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권유에 따라 뮌헨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파사우에서 의사로 봉직했다. 뮌헨에 거주할 당시 그는 릴케와 프랑크 베데킨트 등의 작가들과 교류를 했으며, 1910년에는 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1913년에는 일기 형식을 띤 산문시 ≪뷔르거 박사의 종말(Dr. Bürgers Ende)≫이 출간되었다. 1914년부터 카로사는 뮌헨으로 옮겨 와 의원 생활을 계속하며, 작품 집필에도 열중했다. 1922년에 그의 자전 소설 ≪유년 시절≫이 출간되었으며, 그 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자전소설 세 권을 더 써 냄으로써 독일의 자전소설사에 큰 기여를 했다. 1929년부터는 의사 생활을 접고 작품 생활에만 전념했다. 1931년에는 고트프리트 켈러 문학상을, 1938년에는 괴테 문학상을, 1939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산레모(San Remo) 문학상을 받았다. 1956년 파사우 근처에서 영면했다.
옮긴이
임호일(林虎一)은 고려대학교에서 학사, 석사과정을 마친 후 독일 뮌헨 대학을 거쳐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에서 독일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문과대학장, 도서관장, 한국독어독문학회 부회장, 한국뷔히너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다. 주요 논문으로는 <번역은 원전에 대한 도전이다?>, <추의 미학의 관점에서 본 뷔히너의 리얼리즘>, <가다머의 예술론> 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진리와 방법≫(한스ᐨ게오르크 가다머 저, 공역), ≪한스ᐨ게오르크 가다머≫(카이 하머마이스트 저), ≪희곡과 연극 그리고 관객≫(하인츠 가이거·헤르만 하르만 저), ≪실천문학의 이론≫(플로리안 파센 저), ≪뷔히너 문학전집≫(게오르크 뷔히너 저), ≪이 세상 풍경≫(헤르만 헤세 저) 외 다수가 있다. 그리고 저서로는 ≪천재를 부정한 천재를 아십니까≫가 있다.
차례
최초의 환희
송어
시장광장
정원
습득물
학교와 학생들
마술사
고해
에바
달리기 경주
성탄 미니어처
복수
빛 기부
병에 걸리면
검
헌금 봉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즈음 피조물을 평가하는 내 잣대가 예전의 그 공평성을 잃었다. 이때부터 나는 이미 위의 작은 요괴들이 악마의 후예라는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스럽게 생긴 작은 벌레들은 우리가 그들의 존재 의미를 모른 채 단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그들에게 투영함으로써 거부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은 그 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따금 진기하게 생긴 땅거미들이 눈에 띄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어머니의 살생부 맨 윗자리를 차지했음에도 내가 한 번도 죽일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진홍빛을 띠고 있었으며, 단단하면서도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마치 살아 있는 보석처럼 그것들은 검은 땅바닥을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달아났다. 나는 이따금 땅거미를 잡아 집게손가락에 올려놓고 그것이 손가락 끝까지 달려가게 하는 재미에 빠지곤 했다. 햇빛이 땅거미의 몸을 투과하여 그것의 핏빛이 반짝거리며 연분홍색을 띠게 되면 나는 다시 그것을 놓아줬다. 땅거미들이 어머니 쪽으로 가까이 가면 나는 어머니 몰래 그것들을 흙으로 덮어 숨겨 주었다.
−44~45쪽
모든 것, 아주 끔찍스러운 것까지도 포함해서, 어떤 것을 대면해도 우리는 그 형상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니까 누구나 익히 잘 아는 형상과 일치시켜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은 겁 없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게 된다.
−52쪽
손가락을 탈골시킬 때마다 탈골된 부위의 피부가 심하게 일그러지고 기형을 띠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나는, 그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 펜에 잉크를 묻혀 정성스럽게 이 부위에다 아주 작은 얼굴을 그려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업은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어머니가 보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세수할 때 물과 비누로 손가락의 얼굴을 씻어 냈다. 엄지손가락 근육을 강제로 움직여서 그곳에 그려진 조그맣고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지게 하고자 했던 내 기대는 충족되었다. 선생님이 한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내 손가락을 보자 거의 울음이 날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아이는 벌을 받았고, 이 사건은 라이징어로 하여금 나를 항상 말썽만 일으키는 놈이라는 악명을 또다시 퍼뜨리게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6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