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함북 부령 출신의 작가 장용학이 쓴 소설 세 작품을 실었다. 1949년 이후 40년 가까이 활동했으며 관념적인 소설을 많이 썼다는 평이다.
<요한 시집(詩集)>
존재론적 가치와 존엄성의 기본마저 부정되는 극한 상황을 통해 실존의 문제를 극명하게 묘파하고 있다. <요한 시집>의 작품 구조는 서(序), 상(上), 중(中), 하(下)의 4부로 되어 있다. 서는 토끼의 우화로써 장식되고, 상은 포로수용소에서 귀향한 동호의 내적 독백을 서술하고 있으며, 중에서는 동호와 누혜가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가 회상 형식으로 나타나고, 하에서는 누혜의 유서를 중심으로 그의 자유의지와 실존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의 서두에 배치된 토끼 우화는 소설 전반의 내용을 암시하는 전경(Foreground)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현대(現代)의 야(野)>
문학청년인 현우는 어머니의 부고장을 돌리러 집을 나섰다가 인민군에게 차출되어 시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된다. 그는 시체를 치우는 작업 도중 시체 속에 파묻혀 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시체 속에서 간신히 나온 그는 전쟁 뒤에 1·4후퇴 때 월남한 사람처럼 호적을 고치고 은행에 취직해 살면서 약혼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과거의 애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외면하고 만다. 과거의 자신과의 단절을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무죄를 주장하지만 그의 무죄를 증명해 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재판장은 그에게 10년 형을 선고한다. 그는 감옥 문에 끼여 졸지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에게 세계는 철저히 폭력적인 횡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현우의 불우한 삶의 역정은 곧 불온한 현실 세계에 대한 극명한 고발과 부정으로 읽힌다.
<상립신화(喪笠新話)>
현실과의 불화와 비판 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이 소설은 장용학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인후의 어머니는 복막염으로 죽게 된다. 이것은 장용학의 어머니 역시 복막염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이 밖에도 이 소설 곳곳에 그의 생애와 일치하는 부분들이 반영되어 있다. 인후는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병원, 절(불교), 성당 등을 전전하지만 모두 실패하자 복잡한 분열 의식에 시달린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긍정)과 배반(부정)으로 인한 분열이고,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와 어머니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울음을 막는 나’로의 분열, 즉 본질적 자아와 타의적 자아의 분열이다. 어머니의 죽음의 문제를 통해 자아와 세계의 불협화음과 함께 자아의 내적 분열상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0자평
한국전쟁 전후의 경제적 궁핍, 도덕적 타락, 정치적 혼란 속에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던 소설가 장용학. 그는 존재론적 불안과 파탄의 극한에서 앞 세대와 뚜렷하게 변별되는 새로운 문학적 양식을 충격적으로 보여 주었다.
지은이
장용학은 1921년 4월 25일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면 부령동 357번지에서 부친 장지원과 모친 박숙자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0년에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에 입학한다. 장용학의 일본 유학은 훗날 그의 소설에서 한자 사용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후 청진의 지방 문단에서 김진수, 강소천 등과 어울려 학교 연극의 각본 연출을 맡기도 한다. 그가 월남한 것은 1947년 9월이었다. 그는 월남한 이유에 대해 “공산주의가 싫고, 희곡을 쓰고 싶어서”라고 했다.
1949년 단편 <희화(戱畵)>(≪연합신문≫, 1949. 11. 19)를 발표한 데 이어 1950년 <지동설(地動說)>, 1952년 <미련 소묘(未練素描)>가 ≪문예≫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단편 <요한 시집>(≪현대문학≫, 1955. 7)과 중편 <비인 탄생(非人 誕生)>(≪사상계≫, 1956. 10∼1957. 1)을 발표한 후다.
장용학은 과다한 한자 사용과 관념에의 치중, 우화를 통한 주제 암시, 등장인물의 기괴함 등으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중편 <역성 서설(易姓 序說)>(≪사상계≫, 1958. 3∼6), 희곡 <일부변경선 근처(日附變更線 近處)>(≪현대문학≫, 1959. 7∼9), 장편 ≪원형의 전설≫(≪사상계≫, 1962. 3∼11)을 발표했다. 그는 한자 사용을 고집해 이희승·이가원 등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1969)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 밖에 주요 작품으로 단편 <현대의 야(野)>(≪사상계≫, 1960. 3), <유피(遺皮)>(≪사상계≫, 1961. 8), ≪청동기≫(≪세대≫, 1967. 8∼1968. 5, 1968. 7∼12), <잔인의 계절>(≪문학사상≫, 1972. 11), <상흔(傷痕)>(≪현대문학≫, 1974. 11), 중편 <효자점경(孝子點景)>(≪한국문학≫, 1979. 1), <오늘의 풍물고(風物考)>(≪현대문학≫, 1985. 6), 교양서 ≪허구의 나라 일본≫(일월서각, 1984) 등이 있다.
엮은이
홍용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고 편운문학상, 젊은 평론가상, 시와 시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구서 ≪김지하 문학 연구≫,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이 있고 편저로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이 있다.
차례
요한 시집(詩集)
현대(現代)의 야(野)
상립신화(喪笠新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러는 사이에 중학생이 되었다. 소매 끝에와 모자에는 흰 두 줄이 둘렸다. 그 줄 저쪽으로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 이쪽에서는 아무 짓을 다 해도 좋다는 것이다. 나는 二重으로 매인 몸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투성이였다. 어느 집에나 다 창문이 있고, 모든 연필은 다 기룸한 모양을 했다. 모든 눈은 다 눈섭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급생을 보면 신이 나서 모자에 손을 갖다 붙였다. 그러면 저쪽에서 보통이라는 듯이 간단간단히 끄덕거렸다. 그것이 대견스러워서 나는 더 신이 나서 팔이 아프도록 경례를 했다. 중학교에서 나는 모범생이었다. 열일곱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돌담에 비친 내 그림자를 뱀이 획 스치고 다라났다. 나는 곡괭이를 찾아 들고 그 담을 부시어 버렸다. 모범생이라는 벽에 가리어져 빛을 보지 못했던 나는 한길에 나선 것이다.
드디어 나의 책상 앞이 되는 벽에는 ‘自律’이라는 ‘못토’가 붙었다. 그것이 더 깊은 他律의 바다에 빠져드는 길목이 된다는 것을 몰랐고, 좀 지나서 대학생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