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김기택 시인은 시 쓰기의 시작이 자신을 견디는 것, 삶을 견디는 것, 삶이 육체에 부과한 짐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까 전전긍긍한 데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들은 언제나 펜 끝에서 나왔다. 책상이 아니라 길 위에서 나왔다. 이 책에는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을 비롯해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쓴 52편의 시를 실었다.
지은이
김기택은 1957년 경기도 안양시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가뭄>과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5년 제14회 김수영 문학상, 2001년 제46회 현대문학상, 2004년 제11회 이수문학상, 2004년 제4회 미당문학상, 2006년 제6회 지훈문학상, 2009년 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을 출간했다.
차례
자서
꼽추
가뭄
거북이
겨울새
쥐
호랑이
바퀴벌레는 진화 중
닭
유리에게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얼굴
밥 생각
틈
멸치
구로공단 역의 병아리들
울음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너는 없다
바람 부는 날의 시
우주인
다리 저는 사람
닭살
맨발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얼룩
계란 프라이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소
직선과 원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황토색
머리 깎는 시간
그루터기
벽
전자레인지
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삼겹살
봄
슬픈 얼굴
책 읽으며 졸기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거품
오늘의 특선 요리
울음 2
손톱
구직
모녀
금단증상
고속도로 4
생명보험
키스
김기택은
책속으로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 벌 레 소 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시집을 열며
메모지가 없어서 쩔쩔매다가 영수증 뒷면에 다급하게 적을 때도, 수첩에 알아보기 힘든 글을 갈겨쓸 때도, 나의 시는 언제나 볼펜에서 나왔다. 책상이 아니라 길 위에서 나왔다. 노트에 볼펜으로 써야 시가 형태를 드러냈다. 그 볼펜이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갔던 길들을 여기에 다시 옮겨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