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빙허(憑虛) 현진건은 근대적 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의 한 사람이며,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중요한 소설가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독창적인 소설 미학으로 형상화한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 소설이 현진건에 이르러 표현기법에 있어서 근대소설적 성격을 획득했다는 상찬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진건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지새는 안개≫ 등의 자전적인 소설들, 둘째 <피아노>에서 <서투른 도적>에 이르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한 작품들, 마지막으로 ≪적도≫, ≪흑치상지≫로 대표되는 장편소설들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첫째 시기의 작품 군 중 <빈처>(≪개벽≫, 1921. 1), <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 11), <타락자>(≪개벽≫, 1922. 1∼4)가 실려 있다. 식민지 근대 지식인의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들이다.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1920년대 초는 서구의 문예사조가 적극적으로 유입됨으로써 본원적 의미의 근대소설이 출발하던 시기였다. 특히, 3·1운동 이후 이 땅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기 시작했다. 현진건은 신소설과 ≪무정≫ 등이 보여준 계몽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근대’의 문제를 식민지 조선의 절망적 현실과 연관해 추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초기 소설의 경향은 사회·역사의식이 빈약하다는 지적이나 식민지 지식인의 편협한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고 평가받아 왔다. 이러한 평가는 연구자가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 당대의 현실을 재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데, 현진건의 초기 소설 삼부작이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나아가 서구 중심의 근대성과 식민지 조선의 파행적 근대성 사이에서 길항(拮抗)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진솔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우리의 특수한 근대적 일상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빈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를 구체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지식에 목말라 중국, 일본 등지로 굴러다니다가 ‘금전의 탓’으로 지식의 바닷물도 미처 마셔 보지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듯, <빈처>는 근대적 가치와 봉건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는 식민지 현실을 지식인의 시각으로 진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는 전통과 근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리는 서구적 근대(계몽주의)도 봉건적 관습도 인정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정직하게 응시하게 한다. 작가의 처지는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빈처>는 서구적 근대 문화의 허와 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식인의 분열된 내면, 즉 근대의 세속적 가치를 수용할 수도, 그렇다고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딜레마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술 권하는 사회>는 <빈처>에서 임시적으로 봉합됐던 아내와의 화해가 ‘술’을 매개로 다시 표출되는 작품이다. 아내의 의식은 변함이 없다. 오직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이 성공하기만 고대한다. 오히려 <빈처>의 아내보다 퇴행적이기까지 하다. 이에 반해 남편의 내면은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제 남편의 의식 속에 ‘돈벌이’에 대한 욕망은 들어설 틈이 없다. 남편은 일본에서 배워 온 지식(서구 중심의 근대 문화)으로 식민지 사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그러나 번번이 좌절한다. “이 社會란 것이, 내게, 술을 勸한다오. 이 朝鮮 社會란 것이, 내게 술을 勸한다오. 알앗소?”라고 반문하는 남편의 모습은 비록 추상적이지만, 서구적 근대(동경 유학에서 얻은 지식)와 우리의 근대(식민지 현실) 사이의 틈새에 끼어 대안을 찾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진솔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화자의 절망은 일본을 통해 근대 문화를 수용한 식민지 지식인이 실질적인 근대화에 기여할 통로가 차단된 조선에서 경험하는 좌절에서 기인한다. 현진건은 근대사회의 주체인 이성적인 지식인이 오히려 식민지 근대사회에서는 무능력함을 일상적인 영역에서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자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 조선이 요구했던 개인은 봉건적인 질곡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이었는 데 반해, 그 요구에 응한 것은 고립되고 단자화된 개인이었던 것이다. 서구의 문화주의와 일본을 거쳐 왜곡 수입된 그것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고뇌와 방황은 <타락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타락자>는 아내와 기생, 전통과 서구 문화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통해 조선의 비극적 운명을 적나라하게 응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이 작품은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을 자기기만적 일탈의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라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춘심’이란 기생을 서구적 지식의 변용이라 간주한다면 의미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타락자>는 통속 연애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 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작가의 고뇌와 방황이 가로놓여 있다. ‘춘심’과의 사랑이 좌절되는 모습은 왜곡된 서구 문화의 파행적 수용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전통)으로의 회귀도 여의치 않다. <빈처>에서 드러난 아내의 헌신적 사랑을 통한 위안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자유연애의 산물인 ‘임질’로 인해 배 속의 태아가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태중에서 몸부림치는 이 생명이야말로 현진건이 <고향>에서 포착한 ‘조선의 얼굴’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식민지 조선의 신산(辛酸)한 표정이 아닐까? 이 ‘싸늘한 전율’에 전신을 떠는 지식인의 자의식이야말로 식민지 조선의 근대성을 표상하는 한 징후라 할 수 있을 터다. 즉 보편적 가치로 추구해 온 근대를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자기인식이다. 이러한 절망적 자의식을 통해 현진건은 ‘조선의 얼굴’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200자평
근대적 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이자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중요한 소설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독창적인 소설 미학으로 형상화한 작가이기도 한 현진건의 초기 삼부작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는 우리 근대성의 기원을 검토하는 데 주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서구의 근대성과 우리의 특수한 근대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현진건 소설의 주인공들은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절망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지은이
빙허 현진건(1900∼1943)은 1920년대 한국 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단편 작가이자 사실주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근대적 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였으며,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중요한 소설가로 평가된다. 또한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독창적인 소설 미학으로 형상화한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빙허는 대구에서 출생해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조 중학교를 졸업했다. 다시 중국 상해에 있는 호강 대학의 독일어 전문부에서 수학하다 중도 포기하고 귀국해 문학에 투신했다. 1920년 <희생화>(≪개벽≫)를 통해 문단에 등장했다. 1921년 단편 <빈처>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1922년에는 박종화, 나도향, 홍사용 등과 동인지 ≪백조≫를 창간했다.
현진건은 기자로도 활동했는데,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당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그 보도사진을 손봐서 게재한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돼 약 1년간 복역했다. 1943년 44세의 나이에 장결핵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특히, 현진건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고독한 지식인의 내면적 절규로 포착한 작가다. 초기 삼부작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부정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초탈할 수 없다는 역설적 진실을 아이러니를 통해 발견하도록 해준다. 그는 한편으로 근대성을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적 근대의 속악한 현실에 순응할 수 없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진솔하게 포착했다.
빙허는 이러한 자의식 탐구의 극점에서 민중과 만난다. 초기 삼부작 이후 발표된 <운수 좋은 날>, <고향> 등은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일제 강점기 빙허의 문학은 지식인과 민중이 만나는 특이한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셈이다.
엮은이
고인환은 1969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예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순정한 허구, 혹은 소설의 죽음과 부활-성석제론>을 통해 등단했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제7회 젊은평론가상(2006)을 받았다. 저서로 ≪결핍, 글쓰기의 기원≫(2003),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2005),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2003), ≪공감과 곤혹 사이≫(2007), ≪한국문학 속의 명장면 50선≫(2008), ≪작품으로 읽는 북한문학의 변화와 전망≫(공저, 2007), ≪메밀 꽃 필 무렵≫(편저, 2001)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재미있고 알찬 글을 읽고 쓰기 위해 학생들과 고민하는 한편, 민족문학연구소, 남북문학예술연구회에서 근대문학, 북한 문학, 민족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차례
빈처(貧妻)
술 권(勸)하는 사회(社會)
타락자(墮落者)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안해는, 요강에 걸타안저, 왼몸을 부들부들 떨고 잇다. 참아 볼 수 업서, 샛발가케 얼굴을 찡그리고 잇다. 그 눈에서는, 苦惱를 못 이기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엿다.
(…)
그의 胎中에는, 지금 새로운 生命이 움즉이고 잇다. 이 結果가 어찌 될가!?
싸늘한 戰慄에, 나는 全身을 떨엇다. 찡그린 두 얼굴은, 서로 뚜를 듯이, 마조 보고 잇섯다. 肉體를, 點點히 씹어 들어가는, 모진 毒菌의 去就를 삷히랴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毒한 벌레에게, 뜨더 먹히면서, 몸부림을 치는, 어린 生命의 악착한 悲鳴을, 分明히 들은 듯십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