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육필시집은 시인이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시집이다.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들을 골랐다. 시인들은 육필시집을 출간하는 소회도 책머리에 육필로 적었다. 육필시집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육필시집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시를 다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했다. 시를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필 이외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친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간혹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있기에 맞은편 페이지에 활자를 함께 넣었다.
이 세상에서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 고 김춘수, 김영태, 정공채, 박명용, 이성부 시인의 유필을 만날 수 있다. 살아생전 시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200자평
1987년 등단 이후 모순과 불화를 넘어 화해와 소통으로 향하고자 노력해 온 임동확 시인. 그의 시 가운데 표제시 <희망 사진관>을 비롯한 40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가려 뽑고 정성껏 손으로 써서 실었다.
지은이
임동확은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을 펴냈다.
차례
시인의 말
저녁의 노래
겨울 북천
가을날에
허공의 길
구성폭포(九聲瀑布)
누명
호박
내 애인은 왼손잡이
만경평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며
마음은 천 리
사이
남쪽에 내리는 비
소리를 보다
영지(影池)
무영탑
희망 사진관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연가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비수
처음 사랑을 느꼈다
중력을 이기는 법
잃어버린 우산
주목(朱木)
한 줌의 도덕
눈길
시인들·1
풍란
춘신(春信)
꽃과 가시
끝나지 않은 시간
헌사(獻辭)
비둘기는 그 어디에 숨어 새끼를 치는가
이유는 없다
사직 공원의 비둘기 떼
첫눈을 맞으며
가족도(家族圖)
바다로 가는 길
밤비
임동확은
책속으로
희망 사진관
−아직-아님으로서 아님은 생성된 존재를 가로질러 간다(에른스트 블로흐)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는 게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 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떡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개고 외면해 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 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할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 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 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 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은 낯섦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시인의 말
새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면서 오랫동안 활자에 갇혀 있던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 추억과 사건들이 생생한 현재형으로 되살아나는 기이한 경험이여.
아아! 나의 모든 시는 졸필 같은 몸의 시간이 빚어낸 것들이었구나. 그래서 시도, 삶도 함부로 살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