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시대에 나온 대표적인 군담소설이다. 경판 30장 단책본을 저본으로 하여 전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주석을 붙였다. 695개에 달하는 주석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조웅전(됴웅젼)≫은 군담소설 즉 ‘전쟁 이야기’다. 이본 역시 많다. ≪조웅전≫이 완판·경판·안성판에 모두 들어 있고, 또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이 작품이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많이 읽혀졌다는 근거가 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이본은 판각본 경판 3종, 완판 약 15종, 안성판 1종, 필사본 약 50여 종, 활판본 약 10여 종으로, 도합 80여 종을 헤아린다.
≪조웅전≫의 작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난삽한 고사성어·한문구·삽입 가요들의 빈번한 사용은 이 작품의 작자의 계층에 대하여 어느 정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웅전≫의 작자는 한문 식자층으로 가상된다. 여기서 좀 더 추측을 진전시켜, 자유연애·육정적(肉情的)인 표현 등 전통적인 유교 이념에 배치되는 내용들이나, 전편에 걸쳐 독자의 흥미를 돋우려 했던 작가의 의식적인 배려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조웅전≫은 소설 작법의 기교가 어느 정도 발달한 시기에 상당히 전문적인 작가에 의해서 창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웅전≫은 작자뿐만 아니라 창작 연대도 불확실하다. ≪조웅전≫은 이태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증오한 어떤 사람이 이를 풍자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즉 이태조를 이두병에, 이방원을 이관에 비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설사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조웅전≫의 창작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찍이 조윤제는 ≪조웅전≫을 비롯한 군담소설들이 임·병 양란 후에 창작되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추정 역시 너무나 막연하다. 그래도 여러 가지 상황을 판단한 결과, ≪조웅전≫의 창작 연대가 기껏해야 지금으로부터 2세기 이상을 더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근거는 고전소설 제명의 구체적 언급으로 자주 거론되는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추재집≫이나 소전기오랑(小田幾五郞)의 ≪상서기문≫(1794)에 ≪조웅전≫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두 저작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에 없었다는 단정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저작들에 ≪소대성전≫·≪설인귀전≫·≪장풍운전≫·≪장박전≫(≪장백전≫?) 등이 인용되고 있는 터에, ≪조웅전≫과 같은 인기 소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크다.
≪조웅전≫의 내용상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의 탄생에서 기자(祈子) 정성이나 태몽이라든가 천상인의 하강과 같은 모티브가 전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군담소설들이 발단부에서 하나의 투식으로 기자·태몽이 제시되고, 주인공의 신분이 고귀하고 그 능력이 초월적임을 예시하기 위하여, 천상 선관 또는 ‘아무 별[某星]’의 적강(謫降)을 보이는 데 대해, ≪조웅전≫에서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배려로 보인다. 즉 작가는 조웅의 비범한 능력이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군담의 묘사에 있어서도 다른 군담소설에서와 같은 바람과 비를 부르거나[呼風喚雨] 범과 표범으로 변하는[作虎作豹] 것과 같은 도술전이 거의 거세되어 있어 덜 환상적이다.
200자평
조선시대에 나온 대표적인 군담소설이다. 경판 30장 단책본을 저본으로 하여 전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주석을 붙였다. 695개에 달하는 주석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지은이
미상
옮긴이
조희웅은 194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학교 전임강사와 국민대학교 교수, 미국 하버드(Harvard) 대학교 객원교수, 일본 규슈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회 회장과 한국고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동안의 저서로는 ≪구비문학 개설≫(공저, 1971), ≪조웅전≫(1978), ≪조선 후기 문헌설화의 연구≫(1980), ≪설화학 강요≫(1989), ≪이야기문학의 모꼬지≫(1995), ≪한국설화의 유형≫(1996), ≪고전소설 이본목록≫(1999), ≪고전소설 작품연구 총람≫(2000), ≪고전소설 문헌정보≫(2000), ≪Korean Folktales≫(2001),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 1·2≫(2002), ≪편옥기우기≫(공저, 2002), ≪영남 구전자료집 1-8≫(공편, 2003), ≪영남 구전민요 자료집 1-2≫(공편, 2005), ≪고전소설 연구보정(상·하)≫(2006) 등이 있으며, <원생몽유록 작자 재고>(1963) 이후 현재까지 1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전 25책)≫(지식을만드는지식, 2012)을 낸 바 있다.
차례
경판 조웅전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여러 해 되매 조정(朝廷)의 정사(政事)가 산란하매, 간신 두병이 전권(專權)하여 조정을 자로 참소(讒訴)하니, 승상이 해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스스로 약을 먹고 죽으니, 슬프다. 사람이 어짊으로 악인을 이기지 못하고 죽으매, 이런 고로 천자가 화상(畵像)을 걸고 그 충절(忠節)을 빛내시더니, 이때 추절(秋節)을 당하매 상이 친행(親行)하사 제(祭)하시고 석사(昔事)를 추감(追感)하사 슬허하실새, 차시(此時) 병부시랑(兵部侍郞) 두관은 두병의 아들이라 상을 모셨더니, 상이 슬허하심을 보고 분심(忿心)이 복발(復發)하여 주(奏) 왈(曰),
“조정이 비록 공은 있사오나, 조신(朝臣)이 다 조정만 못하지 아니하오니, 어찌 조정만 이같이 하시리이꼬. 묘호(廟號)를 거두심이 마땅하여이다.”
상이 노(怒) 왈,
“신자(臣子)가 되어 충효가 으뜸이라. 조정은 국가의 큰 공신이거늘, 네 충량(忠良)을 시기하니 어찌 분한(忿恨)치 않으리오.”
두관이 황공(惶恐) 퇴조(退朝)하더라. 상이 환궁(還宮)하시고 승상부에 전교(傳敎) 왈,
“충렬공의 아들이 있거든 빨리 입시(入侍)하라.”
하시다.
선시(先時)에 왕부인이 잉태 칠삭(七朔) 만에 승상이 기세(棄世)하매 망극(罔極)하나, 복중아(腹中兒)를 보전(保全)하여 십삭(十朔) 만에 생(生)하니, 얼굴이 비범하여 산천 수기(秀氣)를 품었으니 일세 기남자(奇男子)라. 이름을 웅(雄)이라 하고 장중보옥(掌中寶玉)같이 사랑하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