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로마 비가≫는 괴테의 로마 체류와 이탈리아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괴테가 붙인 제목과는 다르게 이 비가들은 이탈리아에서 바이마르로 돌아와서 쓴 것이다. ≪로마 비가≫와 그 언저리에서 나온 시들은 1788년 10월과 1790년 4월 사이에 생겨났다. 이 시들이 생겨나는 데 본질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탈리아에서 감각적으로 해방되었던 경험과,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크리스티아네를 통해 성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던 점이었다. 즉, 크리스티아네와의 사랑이 괴테에게 이탈리아를 시적으로 추억하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그런 방법으로 현재로 불러내는 작업을 하면서, 특히 고대 작품들에 대한 경험을 문학적으로 가공하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관계들을 간접적이고도 관능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로마 비가≫는 시를 쓰는 괴테의 작업이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 괴테가 슈트라스부르크 시절부터 첫 번째 바이마르 체류까지 쓴 시들은 대부분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비가≫ 이후에 쓴 괴테 시들의 특징들은 오히려 글 쓰는 주체와 거리를 두는 텍스트를 만들어 내려는 고도의 예술가적 의식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쓴 시들은 그런 경험들에 담긴 자서전적인 동기와 모티프를 뛰어넘고 있으며, 이런 예술적 특징이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표현보다 더 우선하고 있다.
≪베네치아 에피그람≫에서는 자신이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실망감을 테마로 삼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변해서 돌아온 괴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보여 주는 반응에 대한 실망감도 또 하나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 모티프에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했다는 느낌, 출판된 자신의 전집이 독자들에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모욕감, 그리고 바이마르에서 크리스티아네와의 관계 때문에 부딪히게 되었던 친구 및 지인들의 몰이해와 악의적인 험담을 방어해야 했던 경험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베네치아 에피그람≫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것은 괴테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반응했던 첫 번째 문학적 증언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반응했던 괴테의 작품들은 정치적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의 ‘문학적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괴테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얻게 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혁명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숙고해 보고, 문학과 당시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면서,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문학적 대답을 실험해 보았던 것이다. 이 실험의 결실은 괴테의 예술관과 1790년대 중반 이후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고, 그럼으로써 1794년부터 1805년까지 이어지는 실러와의 10년이 넘는 공동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는 ‘바이마르 고전주의(die Weimarer Klassik)’의 전성기, 즉 10년간의 고전주의를 이루게 된다.
괴테의 시는 1794년 여름부터 시작되는 실러와의 공동 작업으로 하나의 방점을 찍게 된다. 1795년 스위스 바젤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그 결과로 북부 독일과 남부 독일 그리고 바이마르 공국은 1806년까지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던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이 평화적 시기가 10년간의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전제 조건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놀랄 만큼 많은 시들이 만들어졌다. 괴테와 실러가 공동 작업을 하던 시기는 괴테의 시 창작에서 절정을 이룬다. 괴테는 1790년대 초반의 혼란기에 경험했던 것들을 슬쩍 넘어가거나 거부하지 않고 시적으로 이탈리아에 연결할 수 있었다. ≪로마 비가≫와 ≪베네치아 에피그람≫이 1795년 실러가 발행하던 잡지 ≪호렌≫과 ≪문예 연감≫에 발표되었고 이 두 잡지는 그 이후 괴테의 시를 발표하는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괴테가 쓴 새로운 시들의 특징은 바로 고대였다. 6각운과 비가의 기본 형태인 2행시는 고전주의 시대에 괴테가 쓴 시들의 기본 형태가 되었다. 독일어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이 고대의 시 형태들은 현시대에 대해 거리를 두려는 작가의 의식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대의 시 형태는 괴테가 1790년대 중반부터 시대적 사건을 다시 받아들 수 있었던 냉정한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로의 방향 전환이 시의 형태에만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고대의 문학은 괴테의 도전이었다. 즉, 실러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괴테는 ‘최신 작가’로서 그 도전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대와 현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의식하고 괴테가 쓴 고대 형태의 시들은 모범으로 삼고 있던 고대의 모방이 결코 아니라, 최신 작가로서 고대의 것에서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에 새롭게 도달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상이함과 차이에 대한 의식은 괴테가 고대로 방향을 전환하는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고전주의 시들이 성공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문학에 심취해 계속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고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괴테는 계속 구체적으로 고대의 개별 작가나 작품 또는 특정 장르에 집중하게 된다. 그 밖에도 고대의 형태에 맞춘 문학과 예술에 미학적 영역을 넘어서는 특수하고도 광범위한 효력이 주어지게 된다. 이 고전주의 프로그램에는 이런 미학적 노력의 사회적이고도 문화적인 주장도 들어 있다. 또한 고대를 모범으로 삼는 것은 삶의 실제적 의미도 담고 있다.
200자평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의 고전주의 시대 시들을 모았다. 이탈리아 여행 이후 괴테는 6각운과 2행시인 비가 등, 고대 시 형식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로마 비가≫와 ≪베네치아 에피그람≫은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낸 임우영 교수의 자세한 해설이 어렵기만 했던 괴테를 한층 가깝게 음미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은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 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 ≪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옮긴이
임우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로 있으며,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기획조정처장과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대학생을 위한 독일어 1, 2≫(문예림, 공저), ≪서양문학의 이해≫(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저), ≪세계문학의 기원≫(한울아카데미, 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지식을만드는지식),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괴테. 예술 작품 같은 삶≫(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부, 공역), ≪괴테 시선 2≫(지식을만드는지식), ≪괴테 시선 1≫(지식을만드는지식),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지식을만드는지식), ≪예술에 관한 판타지≫(지식을만드는지식),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지식을만드는지식),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낭만주의≫(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역), 라테군디스 슈톨체의 ≪번역이론 입문≫(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역), 니콜라스 보른의 ≪이별연습≫(월인), ≪민중본. 요한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미학연습. 플라톤에서 에코까지. 미학적 생산, 질서, 수용≫(동문선, 공역), ≪괴테의 사랑. 슈타인 부인에게 보낸 괴테의 편지≫(연극과 인간)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1775년 가을에 흐르는 괴테의 눈물−사랑의 고통 속에서 솟아나는 활기><괴테의 결정적인 시기 1775−“릴리의 시”에 나타난 스물여섯 괴테의 고민>(2015), <흔들리는 호수에 비춰보는 자기 성찰. 괴테의 시 <취리히 호수 위에서>>(2014) <괴테의 초기 예술론을 통해 본 ‘예술가의 시’ 연구. <예술가의 아침 노래>를 중심으로>(2013), <‘자기변신’의 종말?: 괴테의 찬가 <마부 크로노스에게>>(2011), <“불행한 사람”의 노래: 괴테의 찬가 <겨울 하르츠 여행> (1777)>(2008), <영상의 문자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에 나타난 ‘겹상자 문장’ 연구>(2007), <괴테의 ≪로마 비가(Römische Elegien)≫에 나타난 에로티시즘>(2007),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에 나타난 ‘체념(Entsagung)’의 변증법>(2004), <괴테의 초기 송가 <방랑자의 폭풍 노래> 연구. 시인의 영원한 모범 핀다르(Pindar).>(2002), <괴테의 초기 시에 나타난 신화적 인물 연구>(2001), <새로운 신화의 창조−에우리피데스, 라신느, 괴테 그리고 하우프트만의 ≪이피게니에≫ 드라마에 나타난 그리스의 ‘이피게니에 신화’ 수용>(1997) 등이 있다.
차례
1. 로마 비가 Römische Elegien
제1 비가∼제20 비가
편집에서 빠진 4편의 시
≪로마 비가≫ 해설
2. 베네치아 에피그람 Venetianische Epigramme
1∼103
3. 에피그람 유고들 Nachgelassene Epigramme
<1>∼<67>
4. 기타 에피그람 Vermischte Epigramme
고독 Einsamkeit
선택된 바위 Erwählter Fels
농부에게 Dem Ackermann
아나크레온의 무덤 Anakreons Grab
속도 Zeitmaß
경고 Warnung
선생님들 Lehrer
여신은 젊은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Jugendlich kommt sie vom Himmel…
하리라 나는 이른 봄철의 꽃들을… Will ich die Blumen des frühen…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그대를 보았고… Viele sahen dich mit Wonne…
로마의 중국인 Der Chinese in Rom
스위스 알프스 Schweizeralpe
그대 가슴에 장미꽃 거절하지 마오… Weise die Rose nicht ab von deinem Busen…
직접 발명하는 것은 멋지다… Selbst erfinden ist schön…
품위 있는 여인의 모습을 붙잡고 놓지 마라!… Halte Halte das Bild der Würdigen fest!…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Wer ist der glücklichste Mensch?…
5. 비가와 교훈시 Elegien und Lehrgedichte
알렉시스와 도라 Alexis und Dora
에우프로시네 Euphrosyne
재회 Das Wiedersehen
아민타스 Amyntas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
새로운 파우시아스 그리고 그의 꽃을 엮는 처녀 Der neue Pausia und sein Blumenmädchen
식물의 변형 Die Metamorphose der Pflanzen
동물의 변형 Metamorphose der Tiere
서간들 Episteln
바키스의 예언들 Weissagungen des Bakis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제1 비가
돌들이여 내게 말해 다오, 오! 높은 궁전들이여!
거리들이여, 한마디만 해 다오! 수호신이여, 꿈적도 않느냐?
그래! 그대의 성스러운 담 안엔 모든 것 생명에 넘쳐 있는데,
영원한 도시 로마여, 오직 내게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구나.
오! 누가 내게 속삭여 주겠니, 내 마음을 불태워 줄
예쁜 처녀를 어느 창문에서 바라다봐야 할지를?
연인을 찾아 끊임없이 오고 갈 길이 어딘지도 아직 몰라
내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인가?
분별 있는 사람이 여행 중에 행동하는 것처럼,
아직 난 궁전과 성당, 폐허와 기둥들만 바라보고 있구나
그러나 그런 시간도 곧 지나면, 축복받은 자를 맞이하는
유일한 사원은 아모르의 신전뿐이리라.
그대는 하나의 세계로다. 오 로마여,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러면 로마도 로마가 아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