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62년에 출판된 ≪기하학의 기원≫은 데리다에게 카바이예(Cavaillès) 상을 안겨준 그의 처녀작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후설의 유명한 단편 <Die Ursprung der Geometrie(불어판 L’Origine de la Géométrie)>를 번역하고, 여기에다가 매우 긴 서문 해설을 붙였는데, 이 긴 서문 해설로 인해서 이 책이 더욱 유명해졌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번역서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연구서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데리다가 후설 현상학에 대해 쓴 다른 논저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서문의 스타일은 아직 해체적 독해의 기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기에 속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텍스트를 대본으로 삼아 그 위에 새로운 텍스트를 산출하는 구조적 형식은 확실히 해체적 독해의 전략을 예시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제목 ≪기하학의 기원≫이 시사하듯,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이 형성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갖는 역사적 전기들을 밝히는 그런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런 내용은 탈레스로부터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에 속하는 몇몇 철학자들 그리고 플라톤과 그의 아카데미에 속하는 철학자들 그리고 유클리드 등의 수학적 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내용의 역사를 경험적·사실적 역사라고 부른다면, 이 책에서 이런 역사적인 고찰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적잖이 실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하학의 형성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은 한낱 우연한 사실에 불과할 뿐이어서, 기하학이란 학문의 본질에 대해 조금도 알려 주지 않는다. 기하학은 이념적 공간과 이념적 대상성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 이런 이념성은 실재적 공간 속의 실재적 사물들과 관계하는 생활세계에서 이념화라는 조작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 이러한 이념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언어, 게다가 글쓰기라는 것, 이런 것이 기하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특히 글쓰기의 구성적 기능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간과하기 쉬운 ‘문명의 비밀’에 속한다.
200자평
데리다의 사상적 노정 전체의 기원 내지는 원천이다.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농축된 철학적 연구의 결실을 아주 모범적인 논술 형식으로 정교하게 풀어냈다. 데리다는 후설의 원문을 번역하고, 여기에 매우 긴 서문 해설을 덧붙이면서 원문을 더욱 뚜렷하게 빛내고 있다.
지은이
1930년 7월 15일, 알제리의 엘비아르에서 유태계 양친(에메 데리다와 조르제트 사파르) 사이에 태어났다. 1940년에 발발한 알제리 독립 운동의 여파로 프랑스 사회에 번진 셈족에 대한 편견과 폭력으로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바칼로레아를 마친 후, 19세에 파리 고등 사범학교의 철학 전공에 입학한 뒤 카뮈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으며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반유태주의와 유태 민족주의에 대해 똑같이 반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자신의 소속 또는 자기 동일성으로 인한 실존적 고통은 ‘고유한 것의 해체’라는 철학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고등 사범학교에서 헤겔 학자인 장 이폴리트 아래서 헤겔, 후설, 하이데거, 바타유, 블랑쇼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후설 현상학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다시 <문학적 대상의 이념성>이란 표제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에 문학과 글쓰기의 텍스트적인 성격을 인식하면서 점차 해체적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리하여 그는 당시 프랑스 지성계를 풍미하던 ‘고전적’ 구조주의에 대해서도, 불변적인 구조는 의미의 차이 나는 놀이를 제한한다고 비판했다. 1960년부터 4년 동안 소르본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현상학과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이론의 접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끝난 1962년에 최초의 주저인 ≪기하학의 기원≫이 출판되었고, 이 저서로 카바이예 상을 수상했다. 1965년 이후에 고등 사범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치면서 ≪음성과 현상≫,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파종≫, ≪철학의 여백≫, ≪조종≫ 등 많은 저술을 쏟아냈다. 1975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리세(lycée)의 3학년 과정에서 철학을 제외하려는 계획에 반대하기 위한 모임(GREPH)을 주도하고, 1983년에는 국제 철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4년 10월 10일, 신장암으로 투병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옮긴이
1951년 음력 6월 17일 전남 한려수도의 작은 섬 개도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여수로 전학한 후 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 은사의 영향으로 불교와 철학에 심취해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에 진학, 불교와 철학을 공부했다. 실존철학을 거쳐 현상학으로 소급하고, 후설을 공부하다가 데리다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현상학을 주축으로, 불교 유식론과 데리다를 두 바퀴로 삼아 기호와 의미, 언어의 주제를 통해 동서철학의 융합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철학과에서 인식론, 현상학, 철학과 언어, 현대철학 사조 등을 강의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 소개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순수한 본질학이 있다. 순수 논리학, 순수 수학, 순수 시간론, 순수 공간론, 순수 운동론 등과 같은 학문이 그것이다. 이런 학문들은 모든 사고 과정에 있어서 사실의 정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런 학문들에서는 어떤 경험도 경험으로서는-만일 경험이란 말을 현실성이나 현존을 파악하거나 정립하는 의식으로 이해한다면-근거다짐(Begründung)의 기능을 떠맡을 수 없다.
-28쪽
글쓰기 행위는 모든 ‘구성’의 최고의 가능성이다. 이념적 객관성이 지닌 역사성의 초월론적인 깊이는 바로 이 가능성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