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기림이 우리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30년 무렵, 소위 계급주의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카프(KAPF) 계열 문인들의 활동이 정점을 지나 한풀 꺾이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그는 카프 문인이 추구하는 이념 편향적인 태도와 편내용주의적인 활동 방식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 서구적인 의미에서 근대의 추구만이 당대 우리 문학이 추구하여야 할 올바른 길임을 직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모더니즘 문예이론, 주로 영미 계통의 신고전주의·이미지즘 유의 모더니즘 시론을 본격 수입 소개하며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끌게 된다.
그는 당대 문단적 상황에서 우리 문학의 도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구 모더니즘 문예이론과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근대적 시정신의 도입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이를 앞장서서 추진한 근대주의자였으며, 나아가서 마침내는 서구적 근대의 한계를 예감하고 그것의 초극까지를 꿈꾼 탈근대주의자였다.
그의 시론과 비평이 지닌 비평사적 의의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미 계열의 신고전주의적·이미지즘적 모더니즘을 위시한 서구 근대 모더니즘 문예이론의 수입과 소개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 서구의 모더니즘 문예이론을 바탕으로 당대 한국 시단에 새롭게 등장하는 시인들의 활동에 일정한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모더니즘 시를 하나의 체계적인 문학 운동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 셋째, 모더니즘 문예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어두운 면과 부정적인 면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초극하기 위해 노력했다. 넷째, 근대 이후 새로운 세계의 기획과 건설에 시문학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일조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200자평
훌륭한 시인이자 뛰어난 시 비평가 김기림. 문학가이기 전에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그가 가졌던 당대 현실에 대한 불만,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색과 고민이 그의 시와 비평에 녹아들어 있다. 6·25가 지나고도 한동안 그만큼 탁월한 성과를 일구어 낸 비평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은이
김기림(金起林)은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엮은이
김유중(金裕中)은 1965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후 동 대학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대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 중이던 1991년, ≪현대문학≫지의 신인 평론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석사 졸업 후 잠깐 동안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이후 육군사관학교와 건양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모더니즘문학의 세계관과 역사의식≫(태학사, 1996), ≪김기림≫(문학세계사, 1996), ≪김광균≫(건국대출판부, 2000), ≪한국 모더니즘문학과 그 주변≫(푸른사상, 2006),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 2007) 등이 있으며, 편저서로 ≪그리운 그 이름, 이상≫(김주현 공편, 지식산업사, 2004), ≪이범선 작품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김기림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김광균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등이 있다. 현재 한국 현대시의 존재론적 탐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컴퓨터 게임이 지닌 구조와 특성을 인문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융합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차례
‘포에시’와 ‘모더-니티’−妖術쟁이의 手帖에서
手帖 속에서
詩에 잇서서의 技巧主義의 反省과 發展
現代詩의 肉體−感傷과 明朗性에 대하야
午前의 詩論−第一篇 基礎論
午前의 詩論−基礎篇 續論
午前의 詩論−技術篇
故 李箱의 追憶
科學과 批評과 詩−現代詩의 失望과 希望
모더니즘의 歷史的 位置
詩와 科學과 會話−새로운 詩學의 基礎가 될 言語觀
詩의 將來
朝鮮 文學에의 反省−現代 朝鮮 文學의 한 課題
‘東洋’에 關한 斷章
우리 詩의 方向
해설
김기림은
엮은이 김유중은
책속으로
사람들은 어찐 까닭인지 이 두 가지 中에서 오직 하나만 읽으려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중의 하나만을 가려서 加擔할 必要는 업다. 우리들의 過去의 여러 時代는 이 두 精神을 交替해 가면서 信奉하엿다.
現化에 오기까지는 아모도 이 두 가지의 極地의 中間 地帶를 생각한 일은 업다. 鬪爭 속에서도 거기에 얼켜지는 連綿한 關係를 明瞭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드물다. 藝術은 肉體의 參加−다시 말하면 ‘휴매니즘’의 助力에 依하야 비로소 生命性을 獲得한다는 것은 어떠한 古典主義者도 否定할 수 업슬 것이다. ‘로맨티시즘’은 秩序 속에 組織되므로써 古典主義에 接近해 가지고 古典主義는 또한 그 속에 肉體의 소리를 끌어드리므로써 ‘로맨티시즘’에 가까워 간다.
이 두 線이 連結되는 그 一點에서 偉大한 藝術은 誕生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詩에 잇서서도 問題는 勿論 마찬가지다.
―<午前의 詩論>
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箱은 제 肉體의 마지막 쪼각까지라도 손수 길아서 없애고 살아진 것이리라. 箱은 오늘의 環境과 種族과 無知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天才였다. 箱은 한 번도 ‘잉크’로 詩를 쓴 일은 없다. 箱의 詩에는 언제든지 箱의 피가 淋漓하다. 그는 스스로 제 血管을 짜서 ‘時代의 血書’를 쓴 것이다. 그는 現代라는 커−다란 破船에서 떨어저 漂浪하든 너무나 悽慘한 船體 쪼각이였다.
―<고 이상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