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열규의 수필은 혼의 수필이다. 그 혼은 김열규의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넘나드는 자유의 혼이다. 그 혼은 어떤 경계에 머물지 않는다. 그 혼은 어떤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 혼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 그 혼은 때로는 고향 영토를 향하기도 하며 때로는 저 너른 바다 한가운데를 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혼은 그렇다. 우리들 존재의 기원을 향한다. 요컨대 김열규의 수필은 혼이요 자유이자 그 이상이다. 초지일관해 혼이 되어 자유가 되어 존재의 기원을 지향하는 김열규의 수필. 그의 수필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김열규의 수필이 혼의 수필이라면 그 혼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혼인가? 그 혼은 지구 세계를 뒤덮은 모던의 질서가 아닌 신화의 세계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대리한다고 자부하는 모던을 김열규는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김열규만이 아니다. 도대체 오늘날의 누가 이 모던을 예찬하며 신뢰하겠는가? 굳이 모던의 환부를 상상하는 모더니스트들의 예를 들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제도처럼 보이는 모던은 인간의 본원적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이성과 합리가 결코 인간의 본원적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편의를 주는 모던의 질서는 인간의 비합리, 감성, 욕망의 영역을 불온하게 여기지만, 불행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싹튼다.
그렇기에 김열규의 수필은 상식처럼 보이는 모던의 질서가 과연 인간다운가를 묻는다. 또한 그의 수필은 모던의 질서가 과연 본원적 자유인가를 묻는다. 그의 수필은 모던의 질서 저 너머의 비합리, 감성, 욕망을 탐문한다. 제도로서의 모던이 간과하는 인간과 세계의 심층 구조를 김열규의 수필은 천착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열규의 수필은 우리들이 너나없이 고향을 잃은 자들임을 환기한다.
김열규의 수필은 한국인의 수필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묻고 이야기하는 수필이다. 그의 수필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복기한다. 그의 수필을 읽노라면 새삼스레 한국인을 새로이 알게 된다. 오늘날을 일컬어 세계화 시대, 국제화 시대라고들 한다. 까닭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묻는 일은 자칫 상고적 태도로 몰릴 수 있다. 그러나 김열규의 수필은 상고적 태도로 한국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고적 태도의 한국인론은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건 모던이 욕망하는 한국인론이다.
그러나 김열규의 한국인론은 그렇지 않다. 그의 수필은 신화주의적 상상력에 기대어 한국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수필이 이야기하는 한국인은 신화적 한국인이라고 봐야 한다. 김열규의 시각으로 보자면, 모던이 욕망하는 한국인은 진짜 한국인이 아니다. 모던이 욕망하는 한국인은 근대 개념으로 주조된 한국인인 까닭이다. 물론 이와 같은 한국인을 온통 가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열규가 숱한 수필에서 이야기한 한국인은 근대 개념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다. 수필로 이야기하는 그의 한국인론은 그의 귀향과 함께 본격화된다.
200자평
김열규의 수필은 혼의 수필이요 한국인을 이야기하는 수필이다. 그의 수필은 모던의 질서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혼이거나 한국인을 새로이 상상하고 사유하는 신명의 언어다. 그리고 그의 수필은 그 자체로 신명이며 신바람이다. 그의 수필은 때로는 나무로 직립했다가 때로는 남해의 저 너른 바다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의 수필은 한국인을 이야기하는 한바탕 말 축제다.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김열규의 수필은 혼으로, 신명으로, 신바람으로 우리들 곁에서 끊이지 않고 축제로 재생될 것이다.
지은이
김열규는 1932년 2월 1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했다. 김열규의 고향은 그느리로 불렸다. 정정한 나무 그늘에 마을이 안겨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고성 인근 부산에서 다닌다. 중학생이 되어 해방을 맞이한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상경해 대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다. 1959년 충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부임한다. 1962년까지 충남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1963년 평론 <현대시의 언어적 미망>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1963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서강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한다. 서강대학교에서 김열규는 신화, 문학, 민속학 등을 연구하고 강의하며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한국학자로 주목받는다. 1971년 일조각에서 출간된 ≪한국 민속과 문학 연구≫는 한국 문학의 원형적 패턴을 밝힌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문학사≫, ≪삼국유사와 한국 문학≫ 등도 한국 문학의 심층 기반을 밝힌 이 방면의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정년을 6년 앞둔 1991년 김열규는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며 읽기와 쓰기의 삶에 전념한다. 낙향은 김열규의 제2의 인생을 여는 계기가 된다. 낙향이 아니라 김열규의 말마따나 상향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였다. 고향 인근의 대학들이 김열규를 초빙했다. 김열규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인제대학교에서 교수를 한다. 일흔의 나이에 인제대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계명대학교에서 김열규를 석좌교수로 초빙한다. 김열규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원장직을 수행하며 석좌교수를 지낸다. 고향에서 김열규의 글쓰기는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공부≫, ≪행복≫, ≪한국인의 에로스≫, ≪욕, 카타르시의 미학≫, ≪한국인의 신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한국인의 자서전≫, ≪독서≫, ≪푸른 삶 맑은 글≫의 원고가 그의 고성 서재에 탈고된다. ≪세계일보≫에 칼럼 <김열규의 예맥>을 연재하던 중 2013년 10월 22일 향년 81세로 타계한다.
엮은이
양진오는 1965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대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현대 소설론, 한국 현대 작가론 등을 강의한다. 1993년 비평 전문지 ≪비평의 시대≫ 2집에 <새로운 연대, 노동 소설 읽기>를 발표하며 문학 평론가로 등단했다. ≪전망의 발견≫, ≪임철우의 봄날을 읽는다≫, ≪당대의 한국문학 한국문학의 당대≫ 등을 출간했다.
차례
시간의 빈터에서
하늘에 솟은 나무
바다에서 죽은 魂에게
情恨
序章·故鄕이 없는 얘기
내 고향 남쪽 바다
길고 어두운 젊은 迷路
情
인간적인 것의 파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의 얼굴
한국인의 갈등과 해결
서로 외면한 삶과 죽음의 거리
떠도는, 헤매는 우리들의 넋
맺히면 풀어라
수필 생각, 인생 생각
바다에서 1
바다에서 2
바다에서 3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대학을 다닐 때, 방학하여 귀성할 때마다 나는 “집에 간다”고 했다.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닌데 고향이란 말을 써 본 적이 없다. 내 속에 아예 “내 고향”이란 말은 없었던 것도 같다. 그러고는 농촌이나 어느 두메에다 집을 둔 친구들이 “고향에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유심히 귀담아듣곤 하였다.
기차 타고 천 리. 먼 길을 달려가 P시(市)의 커다란 역사(驛舍)를 나서 보았자 서울과 달라진 게 없다. 커다란 시멘트의 ‘하꼬방’인 빌딩. 질주하는 굴뚝인 버스의 행렬(行列). 멍추처럼 쾽하니 뚫린 거리.
거기 서서 “아, 고향이여!”라고 했다 치자. 내가 정신분렬증(精神分裂症)에 걸려서 돌아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수많은 남들이 내 앞을 스쳐 갈 것이다. 그것이 나의 귀성도(歸省圖)다. 내가 “집에 간다”고 하지, “고향 간다”고는 하지 않은 곡절이 여기에 있을 듯하다. 나는 언제나 고향 없는 집에 돌아간 것이다.
<序章·故鄕이 없는 얘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