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소피의 일기≫는 딩링의 초기작으로 작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이다. ‘죽은 듯이 고요한 문단을 공격한 하나의 폭탄’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존의 여성에 대한 서사와는 다른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의 5·4 신문학 운동이 퇴조기로 들어섰을 무렵, 딩링은 일기 형식을 빌려 도발적인 성적 욕구와 냉철한 자기 객관화를 통해 전통적인 성별 질서를 전복하는 ‘소피’라는 인물을 형상화했다. 이렇게 탄생한 ‘소피’는 근 한 세기 동안 서구 문화의 영향과 도시적 감수성의 산물인 ‘신여성’으로 독자들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어 왔다.
일기는 ‘독백’과 ‘관찰’이라는 이중의 시선을 통해, 자기 분열적인 고통스러운 갈등 끝에 자존감 있는 ‘자아’ 만들기에 실패한 여성을 그렸다. 거침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열정과 그것을 가로막는 인습과의 힘겨루기는 소설에서 소녀의 투병이라는 상징적 행위로 구체화되었으며, 그 힘겨루기는 죽음을 마주한 극한 상태로까지 치닫는다. 다른 현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들인 루인, 펑위안쥔, 셰빙신 등이 자기 파괴적인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전통적인 색채가 다분한, 고통 받는 여성의 이미지를 묘사한 것과 비교할 때, 딩링은 기존의 ‘여성다움’이라는 ‘관념’ 자체에 도전한다. 이것이 사랑과 성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딩링의 글쓰기가 다른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와 구별되는 점이다.
200자평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존중받고자 한 딩링의 대표작이다. ‘개성 해방’이라는 5·4 신문학 운동의 여파를 ‘소피’라는 한 여성의 내면세계를 통해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절제되지 않은 격한 감정의 흐름이 날카로운 사색의 단편들로 비어져 나온 빼어난 작품이다.
지은이
딩링(丁玲, 1904∼1986)은 1904년 10월 12일 후난성 린리현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7년 단편소설 <멍커(夢珂)>을 <소설월보(小說月報)>에 발표하고, 이듬해 단편소설 <소피의 일기(莎菲女士的日記)>, <여름방학에(署假中)>, <자살 일기(自殺日記)>, <마오 아가씨(阿毛姑娘)>을 연달아 발표해 대담하고 예민한 젊은 여성들을 형상화했다. 청년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딩링은 <소피의 일기>을 통해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930년에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했고, 1931년 열여섯 개 성을 휩쓴 홍수를 제재로 한 <홍수(水)>를 써서 하층민과 현실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며 창작 경향의 변화를 보였다. 항일 전쟁 시기에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중편소설 ≪내가 안개 마을에 있을 때(我在霞村的時候)≫, 간부들의 봉건 의식을 비판한 중편소설 ≪병원에서(在醫院中)≫를 창작했으며, 사회주의 건국 이후에는 토지개혁을 소재로 한 소설 ≪태양은 쌍간강 위에서 빛난다(太陽照在桑乾河上)≫로 1952년에 스탈린 문학상 2등상을 수상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 주편(主編)을 담당해 문예계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1955년에 ‘딩(丁玲), 천(陳企霞) 반당(反黨) 집단’으로 비판을 받고 1958년에는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베이다황으로 보내져 20년간 노동 개조를 겪었다. 1979년 공산당의 제11기 3중 전체회의 후에 복권되었고, 1986년에 세상을 떴다.
옮긴이
김미란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HK 교수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 학술이사이자 아시아 문화 연구자들의 국제 저널 <The Lines : Asian Perspectives>의 편집위원으로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칭화 대학교(淸華大學校) 방문 학자(2001), 상하이 화둥 사범대학교(華東師範大學校) 방문 학자(2005)로 연구했고,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웨더헤드 동아시아 연구소(Weatherhead East Asian Institute)를 학술 연구차 방문(2007)했다. 저서로는 ≪중국 현대문학과의 만남≫(공저, 동녘, 2006), ≪중국의 한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공저, 학고방, 2006), ≪중국은 왜 한류를 수용하나≫(공저, 학고방, 2004)가 있고, 역서로는 ≪딩링≫(다섯수레, 1998)이 있다.
차례
소피의 일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수많은 다정한 몸짓들을 받아들였다. 그 다정한 몸짓은 그가 사창가에서 돈을 뿌리고 즐기다가 남은 것의 반 토막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내 머리카락에 남긴 그의 키스를 생각하면 정말 후회스러워 울고만 싶다! 내가 나 자신을 그의 마음대로 가지고 놀도록 허락했으니, 자신이 웃음을 파는 아가씨들과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나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나 자신이 하려고만 했다면, 강한 거절의 의사를 눈으로 표현하기만 했더라면, 그는 결코 그렇게 대담하게 굴지 못했을 것이다.
59∼60쪽